토목비리 사짜와 지조절개 의사(義士)
“태영호 쓰레기” 野 실체야말로 가관
X고생 끝 탄생한 만리장성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서쪽 가욕관(嘉欲關)에서 동쪽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총 길이 6000여㎞의 거대한 성벽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당시 각 나라마다 중구난방 존재하던 방벽들을 진시황(秦始皇‧시황제‧생몰연도 기원전 259~기원전 210)이 천하통일 후 이어붙인 것이다.
장성이란 개념을 처음 만든 곳은 전통적 의미의 중원(中原)민족이 아닌 묘족(苗族)의 초(楚)나라였다고 한다. 장강(長江)에서 황하(黃河)로 북진(北進)하던 묘족은 중원과의 경계선이 필요해 성벽을 축조(築造)했다. 이후 중원국가들도 이를 따라했으며, 특히 흉노(匈奴)와 영토를 맞댄 조(趙)나라가 적극 활용했다.
만리장성의 이명(異名)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다. 이 거대한 토목공사(土木工事) 완수를 위해 진나라는 삽 들 힘만 있다면 장정(壯丁)이란 장정은 모조리 강제차출했다. 인원이 한 사람이라도 모자라거나 도착시기가 1초라도 늦으면 해당 무리는 전원 처형됐다.
인부들은 장수 몽염(蒙恬)의 감시‧감독 아래 쉬지도 못하고 장성을 쌓아올렸다. 초창기 만리장성 형태는 토성(土城)이었다곤 하나, 중장비 하나 없던 시절 오로지 두 팔 근력만으로 두껍고 높은 흙담을 세워야 했기에 탈진자‧사망자가 속출했다. 당장 독자들께서 삽자루‧곡괭이 하나만 들고 두께‧높이 수m 토담을 ㎞ 단위 길이로 무너지지 않게 쌓아올린다 생각하면 얼마나 힘든 중노동인지 상상할 수 있다.
숨진 이들은 혼백(魂魄)이나마 귀향(歸鄕)하지 못하고 그 시신이 성벽에 던져져 장성의 일부가 됐다. 때문에 만리장성에는 얽힌 슬픈 비사(祕事)가 적지 않다. 특히 남편‧아들을 잃은 여인들의 한(恨) 맺힌 이야기가 많다.
기원전 3세기부터 지금까지 구전(口傳)되는 전래동화 중에는 맹강녀(孟姜女) 설화가 있다. 맹강녀는 시골마을에서 양부모님 모시고 살던 어여쁜 처녀였다. 그녀는 어느 날 만리장성 공사 징집을 피해 달아난 범희량(范喜良)이란 백면서생(白面書生) 만나 혼인했다.
부부는 알콩달콩 사는가 싶었으나 범희량은 누군가의 밀고(密告)로 끝내 북방에 끌려갔다. 1년이 지나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맹강녀는 나날이 초췌해져갔다. 참을 수 없었던 맹강녀는 혹한(酷寒) 몰아치는 어두운 겨울날, 남편에게 솜옷을 주기 위해 홀연히 길을 떠났다.
하염없이 걷고 걸어 맹강녀는 마침내 산해관 근처에 도착했다. 허나 남편을 애타게 부르짖는 그녀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한 병사는 “범희량은 이미 죽어 장성의 일부가 됐다” 알려줬다.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에 맹강녀가 3일 밤낮을 구슬프게 울자 장성이 무너지며 범희량 유골이 드러났다. 오열한 맹강녀는 남편 장례를 치른 뒤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뜻하는 “하룻밤 사이 만리장성 쌓았다” 어원(語源)이 된 비사도 있다. 어느 날 한 떠돌이가 깊은 밤 여염집을 찾아 숙식(宿食)을 부탁했다. 젊고 요염한 여주인은 선뜻 승낙하면서 나아가 동침(同寢)하자 유혹했다.
턱이 귀 밑에 걸린 나그네가 ‘거사’를 끝내자, 여주인은 “내 남편이 만리장성에 노역(勞役) 나갔는데 이 편지 좀 전해주오” 요구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 떠돌이는 선선히 허락했다. 그런데 웬걸, 장성에 도착해 감독관에게 서신 전달한 떠돌이는 그 길로 포박돼 공사장에 끌려갔다. 편지 내용은 기절초풍하게도 “이 남정네가 내 남편과 교대하기로 한 사람이다”였다.
무용지물‧이적행위 배경은 토건족 비리
그런데 만리장성은 그 위용(威容) 무색하게 이민족(異民族) 방어에선 별 효과 발휘하지 못했다.
아무리 인구가 많다 한들, 수천㎞ 길이 성벽을 빈 틈 하나 없이 24시간 365일 지키는 건 불가능하다. 온 나라 장정들을 늘어세운다 해도 이렇게 되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게 된다. 더구나 진나라는 장성 공사에 막대한 예산 낭비해 개병제(皆兵制‧징병제)조차 제대로 운용치 못했다. 게다가 토담은 약간의 물리력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따라서 흉노 등은 틈만 나면 장성을 넘어 중원을 침략했다. 천고마비(天高馬肥) 즉 “가을이 되면 말이 살찌고 흉노가 노략질하러 온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만리장성은 후대에 흙담이 아닌 돌담으로 개수(改修)되고, 인구가 억 단위로 폭증함에 따라 어느 정도 주효(奏效)하게 된다.
그렇다면 진시황은 왜 이토록 무의미한, 마치 대장동 개발특혜 사건을 보는 듯한 대규모 토목공사 벌여 돈은 돈대로 낭비하고 군역(軍役)은 군역대로 소모했을까. 배경에는 대장동 일당을 연상케 하는 ‘사짜(사기꾼) 무리들’이 있었다. 서복(徐福)‧노생(盧生) 등이 그들이다.
서복은 진나라 말기 방술사(方術士)였다. 그는 진시황이 불로장생(不老長生) 비약을 구한다는 소문 듣고 황제에게 접근했다. 또 황해(黃海) 건너 제주도(또는 열도)의 삼신산(三神山)에 그 묘약이 있다 떠벌렸다. 세상 모든 적을 물리치고 이제 마지막 숙적 ‘죽음’과 맞서려던 시황제는 혹해 동자(童子)‧동녀(童女) 수백명과 천금(千金)을 줬다. 길을 떠난 서복은 당연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노한 진시황 앞에 이번엔 노생이란 또 다른 방술사가 등장했다. 야반도주범 서복을 찾아 파견된 노생은, 당연히 한통속이기에 잡아올 리 없고, 대신 선문고(羨門高)란 신선으로부터 천록비결(天簏秘訣)이란 신서(神書) 받았다며 시황제에게 바쳤다.
책 내용을 해석하면 능히 불로장생 비밀을 찾을 수 있다는 그럴싸한 설명까지 곁들여졌으나, 천록비결은 당췌 알아먹을 수 없는 은어(隱語)로 이뤄져있었다. 노생이 아무렇게나 신비한 척 썼을 가능성 높은 책에선 오로지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란 글귀만 해독 가능했다. 뜻은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건 호(胡)”이다.
“저 망할 오랑캐들이 내 천년제국 무너뜨리려 하는구나” 외친 시황제는 그 길로 황명(皇命) 내려 만리장성 구축을 지시했다. 서복처럼 만금(萬金) 챙긴 노생은 비웃기라도 하듯 “천자(天子)가 살육으로 위엄 세우길 좋아하고 갈수록 교만해지니 선약(仙藥)을 줘선 안 된다” 실컷 비방한 뒤 흔적도 없이 잠적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의하면 뒤늦게 속은 것을 안 시황제는 “방사(方士)들이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긴 커녕 부당이득만 취하고 짐(朕)을 비방했다” 격노했다. 그리고는 대살육인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돌입했다. 무수한 피해자 낳은 장성공사‧분서갱유 등 일대(一代) 대사건들 모두 이 희대의 ‘토건족들’에게서 비롯된 셈이다.
고난 딛고 국토 수호한 여류시인
채염(蔡琰‧서기 177~239)은 후한(後漢) 말의 여류(女流)시인이다. 흔히 채문희(蔡文姬)로도 일컬어진다.
채염의 부친 채옹(蔡邕)은 조정에서 시중(侍中) 등 벼슬을 역임했다. 시중은 황제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직책으로서 그의 권세를 짐작할 수 있다. 채옹은 고대 시대상에선 이례적으로 딸에게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특한 채염은 특히 음율(音律)에 정통했다. 채옹과 교분이 깊었던 조조(曹操)도 채염을 조카딸처럼 아꼈다.
채염은 당초 위중도(衛仲道)란 인물에게 시집갔으나 자식은 두지 못했다. 남편이 일찍 요절(夭折)함에 따라 그녀는 다시 친정(親庭)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채옹이 역적 동탁(董卓)의 죽음에 연루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났다.
동탁은 충신 채옹을 강제로 수하처럼 부렸으나 몇 계단씩 벼슬을 높여줄 정도로 아꼈다. 그러한 동탁이 왕윤(王允)에게 처참히 도륙 당하자 막상 비감(悲感)을 참지 못해 통곡했다가 발각된 것이었다. 조조는 붕우(朋友)의 처지를 안타까워했으나 비정한 정치논리 지배하는 조정에서 그가 나설 방법은 없었다.
채염은 가족과 생이별한 채 다급히 달아났다. 언제 어디에서 도적떼‧관병(官兵)과 마주칠지 모르기에 혈혈단신(孑孑單身) 도주는 여인의 몸으로 감당키 힘든 고행이었다. 그런데 채염 앞을 가로막은 건 산적도, 마적(馬賊)도, 초적(草賊)도, 관군도 아닌 ‘흉노’였다.
문명권(文明圈)에서 열외된 흉노는 중원문물(文物) 특히 여성이라면 속된 말로 ‘환장’을 했다. 전한(前漢) 시기 흉노 묵돌선우(冒頓單于)가 한고조(漢高祖)에게 요구한 공물 중 하나가 ‘한나라 공주’였다.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는 왕소군(王昭君)이 시집오자 아예 중원침략마저 까마득히 잊어버릴 정도였다.
자연히 곱디고운 한 떨기 꽃잎 같은 채염을 본 흉노 졸개들은 늑대로 돌변했다. 이들은 여린 채염을 보쌈해 좌현왕(左賢王) 유표(劉豹)에게로 데려갔다. 채염은 춥고 황량한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팔자에도 없는 오랑캐왕 첩이 돼 두 아들까지 뒀다. 그녀가 흉노에 머문 세월은 자그마치 12년에 달했다.
허나 채염은 몸은 잃었지만 마음까지 내어주진 않았다. 흉노 앞잡이가 되어 타락하는 대신 언제나 고국(故國)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 한탄하며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이란 구슬픈 노래 작곡해 수시로 불렀다. 가사 중 일부는 “기러기 북(北)으로 돌아옴이여, 한나라 소식 알고자 함이네. 텅 빈 단장(斷腸)의 슬픔이여, 생각할수록 착잡하다. 눈썹을 모아 달을 향함이여, 거문고를 쓰다듬을 뿐”이다.
이 애절한 곡은 흘러 흘러 중원까지 들어갔다. 바쁜 정복사업 와중에도 채옹‧채염 부녀(父女)를 잊지 못했던 조조는 기쁜 마음에 즉각 좌현왕에게 사자 보내 “채염을 돌려보내라” 요구했다. 조조의 위세 두려워하던 좌현왕은 놀라 떨며, 비록 채염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은 왕족(王族)이란 이유로 자신이 챙겼으나, 군말 없이 채염을 귀로(歸路)에 올려 보냈다.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눈물 흘리고 번뇌(煩惱)하긴 했지만, 채염은 10여년만에 고향땅으로 무사귀환할 수 있었다. 조조의 중매로 동사(童祀)란 이와 혼인한 채염은 나라를 향한 충심(忠心)과 절개(節槪)로 오래오래 칭송받았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흉노에 남겨진 아이들과도 종종 재회하곤 했다고 한다. 흉노 내부정보도 조조에게 입수됐을 것임을 틀림없다.
귀순영웅에게 “쓰레기”라는 전대협‧토목비리 의혹 세력
탈북민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을 두고 명색이 대한민국 제1야당이란 곳에서 인간으로선 하지 말아야 할 ‘쌍욕’이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A씨는 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태 의원에게 ‘북한에서 온 쓰레기’ 등 막말을 내뱉어 구설수에 올랐다.
국민의힘은 8일 국회 의안과에 국회의원 품위유지 의무 위반 등 사유로 A의원 징계안을 제출했다. 전날(7일) 태 의원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국회 앞 단식현장 찾아 “당사자를 출당(黜黨)시키고 의원직을 박탈시켜라” 촉구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일말(一抹)의 뉘우치는 기색도 없었다고 한다. 태 의원,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단식현장에 있던 일부 이 대표 지지자들은 “꺼져라” “빨갱이” 등 폭언(暴言)을 퍼부었다. 태 의원 항의를 묵묵히 듣던 이 대표는, 민주당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태 의원이 자리를 뜨자 ‘아니 억울했던 모양이지?’라며 비아냥댔다고 한다.
이러한 기막힌 모양새 보고 주객전도(主客顚倒)‧본말전도(本末顚倒)라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만리장성 축조와 같은 각종 토목비리 연루 의혹 사면서 이적(利敵) 논란 자초하는 세력과, 진정한 자신의 본국(本國) 품에 끝내 안겨 충성을 다하는 인물 중 과연 누가 ‘쓰레기’이겠냐는 지적이다.
인두겁을 썼다면 최소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알고 보니 A의원은 폭언‧폭력 등으로 악명 높은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전신(前身)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부의장 출신이라고 한다.
현재 정부에서 반공(反共)·반부패 사업 한창인 건 민주당도 알 것이다. 뭐가 그리도 찔려서 A의원과 민주당이 과민반응하는진 모르겠으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기원전 470?~기원전 399) 말처럼 “남 탓하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하고, 우리 옛 말처럼 “남의 가르마 신경 쓰기 전에 자기 가르마나 걱정해야” 한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