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따라 배신‧합심 거듭하다 공멸한 유유상종들
“노인폄하 논란 A씨, 野 실세 판박이” 시선들 집중
‘양중여포’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다. 끼리끼리 뭉친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현인(賢人)은 현인을 알아본다’는 긍정적 의미가 컸으나, 현대에는 속된 말로 ‘양아치는 생양아치하고만 논다’는 부정적 의미로 널리 쓰인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등장인물로 잘 알려진 여포(呂布‧생몰연도 ?~서기 198)는 후한(後漢) 말 무장이다. ‘인중여포(人中呂布‧사람 중에 여포가 최고)’ ‘비장(飛將‧날랜 장수)’ 등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용맹함‧힘의 상징이다.
비장은 전한(前漢) 시기 용장(勇將) 이광(李廣)의 별명이다. 그는 어느날 사냥에 나섰다가 야밤에 호랑이를 발견하고 활을 당겼는데, 이튿날 동이 터 가보니 바위에 화살이 박혀 있더라는 이광사석(李廣射石) 고사로 유명하다. 이러한 일대(一代) 호장(虎將)에 비견될 정도로 여포는 전설 중의 전설이었다.
여포는 실제로 궁술(弓術)은 물론 창술(槍術)‧도검술(刀劍術)‧격술(擊術)‧기마술(騎馬術) 등 모든 무예에 정통했으며 완력 또한 남달랐다. 이는 후한말을 기록한 거의 모든 사서(史書)에서 교차검증된다. 연의에선 찌르고 베는 게 모두 가능한 방천화극(方天畫戟)이란 병장기를 주력무기로 하는 것으로 각색됐다. 변방 중의 변방인 병주(并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출신인 여포는 흉노(匈奴)와 어울려 살면서 이같은 능력을 터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여포에게는 연의 한정으로 또다른 별명이 있었다. 바로 ‘성 셋 가진 종놈‧후레자식‧개망나니’란 뜻의 삼성가노(三姓家奴)다. 실제로도 그의 실상은 인중여포가 아닌 ‘양중여포(양아치 중 여포가 최고)’였다.
이성가노(二姓家奴)가 되다
여포의 친부(親父)‧친모(親母)가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는 지금의 내몽골(內蒙古)자치구인 병주에 출사(出仕)해 첫 벼슬길에 나섰다. 주자사(州刺史) 정원(丁原)은 여포를 마치 친자식 대하듯 아꼈다.
후한 12대 황제 영제(靈帝)가 붕어(崩御)하자 정원은 군(軍)을 이끌고 수도 낙양(洛陽)으로 향했다. 당시 조정은 십상시(十常侍)의 전횡(專橫) 등으로 어지러운 상황이었으나,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은 이를 다스릴 힘도 의지도 없었다. 이에 조정은 외방(外方)의 군벌(軍閥)들을 소집해 십상시를 처단하려던 상황이었다.
원래 전한~후한 중후반까지 천하 13주 자사들에겐 군권(軍權)이 없었지만, 후한말에 이르러 어지러운 정세(政勢)에서 황족(皇族) 유언(劉焉)의 주청으로 병권(兵權)이 주어진 터였다. 정원을 따른 여포는 조정으로부터 궁문(宮門) 수비대장 격인 집금오(執金吾) 벼슬을 하사받았다.
간사한 십상시 무리가 사라지고 어부지리(漁夫之利)로 외척(外戚) 하진(何進) 무리까지 척결돼 한(漢)이 다시 부흥하나 싶었지만 그건 헛된 꿈이었다. 이번엔 조정이 각지에 뿌린 동원령 격문(檄文)이 부작용 일으켰다. 제후 대다수는 조정에 대한 실망감 또는 출병(出兵) 후 이웃 자사‧태수(太守) 침략 가능성에 “무능한 조정 배 째라”며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으나, 하필 그 중 동탁(董卓)이 정원에 이어 수도로 향한 것이었다.
동탁은 (변변찮은 소제(少帝) 폐위 후 총명한 헌제(獻帝)를 새 황제로 세운 것에서 드러나듯) 비록 처음부터 역심(逆心)은 없었다 하더라도, 만인지상(萬人之上)이 돼 천하를 쥐고 흔들려는 야욕 넘치던 상태였다. “천자를 갈아치우겠다”고 선언했다가 만조백관(滿朝百官), 특히 정원의 강력반발에 직면한 동탁은 여포를 꾀어 “정원을 죽여라”고 부추겼다.
그러자 여포는 자신을 알아주고 중용(重用)한 은혜 따윈 깨끗이 잊어버리고서 정원의 목을 베어버렸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배신이었다. 양아치는 양아치를 알아보듯, 동탁은 “아이구 잘했어요 우리 아기, 우쭈쭈” 외치며 헌제를 겁박해 황실(皇室) 경호원 격인 기도위(騎都尉) 벼슬을 여포에게 내렸다. 그리고는 여포를 양자(養子) 삼아서 밤낮으로 제 곁을 지키도록 했다.
마침내 삼성가노(三姓家奴)로 완등(完登)
여포는 일신(一身)의 무예와는 별개로 용병(用兵)에선 영 시원찮았다. 동탁이 천자를 갈고 황실을 욕보이며 백성을 핍박한다는 소식 퍼지자 제후들은 모처럼 합심(合心)해 연합군을 꾸리고 낙양을 쳤다. 동탁은 호진(胡軫)이란 장수를 대장 삼고 여포를 선봉 삼아 대적케 했다.
동탁이 세운 전략은 야습(夜襲)이었다. 이에 여포는 휘하기병 이끌고 횃불 든 채 적군을 공격했지만 연합군 선봉 손견(孫堅) 측 방비가 엄중해 실패했다. 말(馬)과 사람 모두 극도로 지쳐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부스럭 소리가 나자 여포는 지레 겁먹고서 도리어 “적군이 우리를 야습한다”고 외치며 앞장서서 달아났다.
여포는 후일 원소(袁紹) 객장(客將) 시절의 흑산적(黑山賊) 토벌 등에서 드러나듯 평지에서 내달려 적을 짓밟는 것엔 능했지만, 그 외 형태 전투엔 까막눈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연패(連敗)한 동탁은 낙양을 잿더미로 만들고서 어린 천자를 옆구리에 낀 채 고도(古都) 장안(長安)으로 야반도주해버렸다.
그럼에도 동탁은 여포와 유유상종하려 애썼으나 꼬인 심사(心思)들 관계가 오래 지속될 리 만무했다. 어느날 동탁은 사소한 실수를 트집 잡아 여포에게 수극(手戟)을 내던진 적 있었다. 날렵하게 피한 여포는 마찬가지로 날렵하게 아부해 동탁의 화를 풀었으나, 그 때부터 은연중에 동탁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꼬인 심사의 여포는 마치 복수하려는 듯 동탁의 시비(侍婢)와 사통(私通)했으나, 한편으론 불륜이 언제 발각될지 몰라 불안해했다. 이 시비는 연의에서 절세가인(絕世佳人) 초선(貂蟬)으로 각색됐다.
동탁에게 이를 갈던 노신(老臣) 왕윤(王允)은 우연히 이를 알아채고서 여포에게 접근해 역적토벌을 종용(慫慂)했다. 여포가 “그래도 동탁과는 부자(父子) 사이인데”라며 말꼬리 흐리자 왕윤은 “그대는 성이 여씨(呂氏)이고 동탁은 동가(董家)인데 부자는 무슨 얼어죽을”이라고 준엄히 꾸짖었다.
“내가 왜 그걸 생각 못했지” 어디를 탁 친 여포는, 정원 때와 마찬가지로 그간의 정(情)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동탁에게로 달려가 그 비대한 몸뚱아리를 한 창에 꿰었다. 두 명의 의부(義父)를 제 손으로 결딴 낸 여포는 왕윤정권에서 짧은 부귀영화(富貴榮華) 누렸으나, 이내 동탁의 잔당(殘黨)에게 깨강정 되도록 박살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멈출 수 없는 금수본능(禽獸本能)
그런데 그렇게 천하를 방랑하던 여포는 역설적으로 마침내 자신과 같은 ‘후레자식’ ‘영혼의 동반자’를 찾는 데 성공했다. 바로 원술(袁術‧?~서기 199)이었다. 동탁은 비록 악인(惡人)이긴 했지만 효심에선 진심이었다. 정원도 유가적(儒家的) 인물이었다.
원술은 사세삼공(四世三公) 배출한 명문가 출신으로 상술한 원소를 이복형으로 두고 있었다. 원소는 천민(賤民) 어머니를 둔 얼자(孼子)였으나, 자신의 친부‧친모는 물론 계모(繼母) 즉 원술의 친모에게도 효심(孝心)을 다했다.
유교(儒敎)는 삼년상(三年喪)이 기본이었지만, 이러한 풍습은 후한 말에 이르러 이미 허례허식(虛禮虛飾)처럼 돼 있었다. 말이야 쉽지 비가 오나, 태풍이 부나, 폭염이 오나 하루도 자리 비우지 않고 양친(兩親) 묘를 지킨다는 건 목숨 건 행위였다. 더위에 쓰러지거나, 홍수에 휩쓸려가거나, 호환(虎患)에 당하거나, 도적떼에 썰리기 일쑤였다.
이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함부로 상하게 해선 안 된다)라는 또다른 유교적 가르침에 위배(違背)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삼년상을 다 채우지 못한다 해도 내로라하는 유학자(儒學者)들은 통상 모른 척 했으며, 사회적으로도 전혀 지탄받지 않았다.
허나 원소는 계모가 사망하자 벼슬을 그만둔 뒤 낙향(落鄕)해 움막집 짓고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묘(侍墓)살이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천하백성들은 크게 감탄했는데, 원소는 곧장 자신의 출생 전 돌아가신 친부 삼년상에도 나섰다. 옛 책에서나 볼 법한 이 천하의 효자(孝子)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각지 선비들이 줄을 서자 주변 일대 교통은 마비되다시피 했다.
원술은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우선 그의 별명은 노중한귀(路中旱鬼)였다. 가뭄 일으키는 귀신처럼 온 동네방네 들쑤시고 다니며 약탈하고 행패 부린다는 의미였다. 비록 효렴(孝廉)에 추천돼 출사했지만 부패한 후한 말~삼국시대(三國時代) 이전 효렴은 귀족자제에게 주는 명예직 정도로 변질돼 있었다.
원술이 모친을 어찌 대했는지는 기록이 명확치 않으나 그가 삼년상 또는 최소한의 상례(喪禮)에 나섰다는 기록 또한 없다. 더구나 원술은 비록 얼자이지만 그래도 형이었던 원소를 “우리 집 종놈”으로 호칭할 정도로 막나갔다.
방랑 끝에 유비(劉備) 내쫓고서 서주(徐州)에 터 잡은 여포는 당초 원술과 몇 번 투닥투닥 했으나, 조조(曹操)가 침공해오자 이내 원술에게 의지하고자 했다. 한 술 더 떠서 원술이 칭제(稱帝)해 중(仲)나라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잡국(雜國) 세우자 이를 ‘혁신’으로 추켜세우면서, 자신의 딸을 원술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즉 원술의 신하이자 한 집안 사람이 되고자 했다.
허나 원술은 정작 여포가 위급에 빠지자 모른 척했다. 도리어 “여포‧조조가 싸우는 사이 어부지리 취하자”며 대군(大軍) 몰아 서주를 들이쳤다. 여포는 이를 악물고 막아냈다. 두 말종이 제 이익만을 위해 서로 물고 뜯는 사이 어부지리 취한 건 조조였다.
성내에 홀로 갇혀 자포자기해 주색(酒色)에만 빠졌던 여포는, 다른 부하 병마(兵馬) 빼앗아 넘겨줄 정도로 아낀 측근 위속(魏續)의 배신으로 목이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각개격파(各個擊破) 당한 원술은 그토록 멸시한 이복형 도움 얻기 위해 ‘고난의 행군’에 나섰다가, 꿀물 한 잔 먹지 못한 채 피 토하며 고꾸라졌다.
“소인지교감약례(小人之交甘若醴)”
더불어민주당 현 실세(實勢)가 삼고초려(三顧草廬)했다는 인사 A씨를 두고 인성(人性) 관련 의혹이 제기됐다.
노인폄하 논란의 A씨 시누이라는 B씨는 5일 자신의 SNS에서 “A는 단 한 차례도 시부모를 모시고 산 적 없고 (시부모님은) 공경심은커녕 18년 동안 A에게 온갖 악담‧협박 받았다. 돌아가시면서도 쉬이 눈감지 못하셨다”며 ‘시부모를 지극적성으로 모셨다’는 취지의 A씨 주장을 정면반박했다. A씨는 입장 묻는 언론 질문에 지금까지 침묵 중이다.
공교롭게도 A씨는 민주당 실세와 수어지교(水魚之交) 관계라는 평가가 높다. 실세 또한 모친‧친형님 등에 대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 등 논란 겪은 바 있다. B씨 주장이 사실이라고 할 때, A씨와 실세가 말 그대로 유유상종한다는 비판이 조야(朝野)에서 고조된다.
역사상 유유상종 결말은 거의 대부분 좋지 못했다. 삼성가노의 여포, 특히 ‘패륜’ 기치로 뭉친 여포‧원술의 신나는 상호배신은 좋은 예다. 오로지 악행만으로 간담상조(肝膽相照)하고 오로지 이익(利益)과 이윤(利潤)만으로 뭉친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상대와의 관계를 갈가리 찢어버릴 수 있다.
장자(莊子)는 “군자의 사귐은 물처럼 담백하기에 영구(永久)하지만(君子之交淡若水), 소인의 교제는 단술과 같아서 이로울 땐 살갑지만 불리할 땐 뿌리친다(小人之交甘若醴)”고 했다. 각각 사법리스크‧막말리스크 안게 된 민주당 내 두 유유상종 결말이 어찌 될지 흥미롭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노인폄하 문제가 매우 심각하지만, 동시에 노인에대한 무조건적 포퓰리즘도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는 미래세대에 큰 부담을 주고, 노인들에게도 부담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상하게도 누가 찢소리를 내었는가 하면 '살자' 당하더군요. 코드가 맞는 두 사람을 건드려놨으니 혹 제 칼럼이 올라오지 않는다면 살자 당한 것으로 간주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신의 배금주의를 개인주의나 자본주의를 빌미로 정당화하려는 자들은 흔하지만 대놓고 패륜적인 배금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을 보니 새삼 놀라운 사회변화를 체감합니다.
진정 21세기 글로벌 패륜문화를 선도하는 더불어짧은당 싶습니다. 꼭 그 자녀분들이 선대의 패륜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양친의 미래를 가능한 최고 짧게 만들길 염원해봅니다.
🤣
사람이 저렇게 해서 돈 많은 건지, 돈 많으면 저렇게 되는 건지, 아리송합니다. 물론 땀 흘려 정직하게 직접 돈 버신 분들은 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