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됐음으로 우리의 후손들은 앞으로 누대(屢代)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1953년 8월9일 '한미상호방위조약'(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이 가체결된 다음날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이렇게 기뻐했다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왕조까지 중국과 일본 등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은 우리나라는 이날 이후 70년 동안 평화와 안정을 찾았다. 대한민국은 1인당 GDP 3만불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반도체 등을 앞세워 세계 6위 수출국에 올랐다.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하는 유일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흔들리지 않은 국가안보 덕분이었다. 대한민국 안보의 뿌리는 당연히 한미동맹이다. 한미동맹은 1953년 10월1일 워싱턴에서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근본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전문(前文)에는 "본 조약의 당사국은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방위하고자 하는 공동의 결의를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조직이 발전할 때까지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이러한 대명제 아래 대한민국은 미국의 보호 아래 경제성장을 이뤄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시작으로 한미동맹은 발전을 거듭해왔고, 오늘날 윤석열 대통령의 '워싱턴 선언'과 한미 핵협의그룹(NCG) 등의 기틀이 됐다.
2023년인 올해는 6·25전쟁 정전협정이 맺어진 1953년으로부터 70년이 지난 해이자, 한미동맹 70주년이 되는 해다. 수십년간 국가 안보의 큰 줄기였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자연히 얻어진 것이 아닌,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특유의 외교술과 강단으로 쟁취해낸 노력의 산물이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업적인 한미동맹이라는 굳건한 국가안보 위에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부흥을 거쳐 오늘날 세계의 강대국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됐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은, 이승만의 처세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건국 2년 만인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으로 당시 우리나라의 국토는 경상도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흔들림 없는 결단으로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서울을 수복할 수 있었고, 평양을 넘어 진군하면서 전쟁은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 편을 들며 참견하면서 아시아의 작은 국가는 국제전쟁의 전장터가 됐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간 이념전쟁이기도 했던 한국전쟁은 1951년 7월10일, 북한 개성에서 시작된 정전회담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개성회담과 판문점회담 등 총 158차의 정전회담을 거쳐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면서 한국전쟁은 임시 봉합된다. 전쟁 장기화에 부담을 느낀 참전국들이 휴전을 맺기로 했고, 각 진영들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해 교섭에 들어갔다.
미국과 영국, 소련과 중국 등 전쟁을 좌지우지했던 국가들이 협상테이블에서 줄다리기를 시작할 무렵, 정전회담을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들이 있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두 인물은 공통적으로 침략국인 북한과 중국이 내민 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전쟁의 불씨를 완전히 꺼뜨리길 바랐고, 이 전쟁이 한국과 유엔군의 승전으로 마무리되길 원했다.
하지만 고립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미국은 더는 전쟁에 휘말리기 싫어했고,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도 부담이었다. 영국 등 다른 유엔 참전국들도 전쟁에서 발을 빼길 원했다. 미국은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를 해임해 불러들이면서, 동시에 중공군과 포로 송환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전쟁을 끝낼 준비를 했다.
이승만은 동의하지 않았다. 한국의 대통령인 그에게는 휴전이라는 일시적인 조치가 아닌, 보다 확실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가까이 북한부터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으로부터 침략을 막아줄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방패. 전쟁 직후의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었다.
이승만은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경계선이 어디가 되든지 국토를 분할하는 전쟁해결은 침략자에 대한 승리를 인전하는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그러면서 "한국인과 유엔 여러나라 국민을 살해한 적을 용서하고 한국땅을 또 쪼개어 전쟁의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자식들을 바친 부모들에게 뭐라고 할말이 있겠으며, 이런 정치적 과오가 재차 전쟁을 부를 것"이라고 반발했다.
국회와 함께 '북진통일 국민운동 전개'를 결의하는 등 미국 등의 일방적인 결정에 극렬히 반대했다. 또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이에 1953년 5월7일 이승만에 친서를 보내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방위조약을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아이젠 하워의 친서에 대해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기약 없는 약속과 다름없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국가안보와 직결된 사안인 만큼, '휴전하기 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조건을 대통령으로서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미국에 수차례에 걸쳐 휴전 반대 입장과 함께 북진을 주장한 이승만은 그럼에도 미국이 휴전을 강제하려 하자 '초강수'를 뒀다.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반공 포로'를 몰래 모두 풀어준 것이다.
이승만은 공산군 포로 중에서 공산주의 국가로 송환되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을 풀어줌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선물했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유엔군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유엔군도 '반공 포로' 상당수가 자본주의를 선택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들을 이용해 이념적 승리를 꾀하고자 했던 계략이 이승만의 결단으로 무위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일방적인 한미 관계에서 벗어나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미국에 담대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쟁취한 것이 바로 70년동안 이어지고 있는 한미동맹의 기틀, 1953년 10월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 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이자 유일한 동맹조약이다. 동시에 대통령 이승만이 원했던 안전장치였다. 이승만은 정전협정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보를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다.
오로지 국익(國益)이었다. 7월27일 정전협정일에 이승만을 떠올려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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