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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범딸’을 어찌 견자(犬子)에게 주겠나”

오주한

완벽했던 관우, 순간의 폭언에 하늘나라로

막말 난무하는 정치권…동물의 왕국 연상

 

지나치게 오만했던 관우

 

사람은 아무리 화가 나고 분노에 찼다 해도, 또는 아무리 자신감이 충만하다 해도 해야 할 말과 해선 안 될 말을 구분해야 한다. 즉 금도(襟度)라는 게 있다. “입으로 흥한 자 입으로 망한다”는 말처럼 제아무리 뛰어난 영웅호걸이라 해도 단 한 번의 말실수로 ‘쪽박’을 면치 못한 사례는 많다.

 

‘근골(筋骨)로 뭉친 거구’ ‘아름답고 긴 수염’ ‘큰 칼과 적토마(赤兔馬)와 한 권의 책’ 군신(軍神) 관우(關羽‧생몰연도 서기 ?~219년)는 세계 각 국, 특히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에선 모르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후한(後漢) 말의 인물이다. 그는 일신(一身)의 무예와 용병술(用兵術) 모두 뛰어났다.

 

관우는 여포(呂布)와 곽사(郭汜), 손책(孫策)과 태사자(太史慈), 마초(馬超)와 염행(閻行), 방덕(龐德)과 곽원(郭援) 등과 함께 정사(正史)삼국지에 기록된 몇 안 되는 단기접전의 승자다.

 

삼국지 촉서(蜀書)에 의하면 관우는 조조(曹操)와 원소(袁紹)가 격돌한 관도대전(官渡大戰)에 참전했다. 관우는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 가듯 적진을 돌파한 뒤 원소의 대장 안량(顔良)을 찌르고 그 수급(首級)을 취했다. 야전사령관을 잃은 원소군은 지리멸렬해 그대로 퇴각했다. 조조의 일급참모 정욱(程昱)은 관우를 만인적(萬人敵)으로 평가했다. 참고로 대도(大刀)는 후일 송(宋)나라에 이르러서야 등장하는 병장기다. 따라서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는 창작물의 허구일 가능성이 있다.

 

관우는 당시 시대상 무인(武人)으로선 보기 드물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 경서(經書)도 탐독했으며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자 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안량 척살 공로를 조조가 치하하자 “이건 별 것 아닙니다. 제 아우 장비(張飛)는 적장 목 따기를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 합니다”고 겸손히 답해 조조의 두 다리를 후들거리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관우는 출사(出仕) 이전엔 동네 훈장님으로서 학동(學童)들을 가르칠 정도로 귀여운 코흘리개 꼬마들을 좋아하기도 했다. 관우의 인간적 면모를 일컫는 말이 “약자에겐 너그럽고 강자에겐 오만하다”이다. 그러나 말년의 관우는 약자에 대한 인정이 깊은 만큼 그 오만함의 수위 또한 지나쳤다.

 

역적토벌 위해 북벌의 장도(壯途)에 오르다

 

정사삼국지에 따르면 216년 중원(中原)에는 일대 정세변화가 벌어졌다. 그해 4월 조조가 스스로 위왕(魏王)에 즉위한 것이었다.

 

400년 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이성(異姓)제후들의 칭왕(稱王)으로 인한 ‘초한지(楚漢志) 2탄’ 발발을 막기 위해 다음과 같은 율법(律法)을 공포했다. “유씨가 아닌 자는 왕이 될 수 없다” 이는 수백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민관에서 정언명제(定言命題)처럼 자리 잡은 터였다. 때문에 조조의 칭왕은 오체분시를 해도 모자람 없는 대역죄였다. 더구나 한나라는 친왕(親王)들의 전횡 또한 막기 위해 실권을 빼앗았지만 대군을 통솔하는 조조는 달랐다.

 

여파는 적지 않았다. 조조가 왕도(王都) 업군(鄴郡)으로 자리를 옮기자 수도 허창(许昌)은 일부 조조의 수족을 빼고 조정대신들만 남았다. 218년 존왕양이(尊王攘夷)파였던 길본(吉本)‧경기(耿紀) 등 대신들은 “역적타도”를 외치며 허창에서 일제히 봉기했다. 이는 진압됐으나 이듬해인 219년에도 후음(侯音)이란 자가 완성(宛城)에서 조조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완성은 당시 관우가 지키던 형주(荊州)와 지근거리였다.

 

후음 또한 거사에 실패했지만 관우는 이러한 위(魏)나라 내 혼란을 북벌(北伐)의 좋은 기회로 여겼다. 서촉(西蜀)의 유비(劉備), 형주의 관우가 두 갈래로 북진(北進)해 조조를 사로잡고 천자(天子)를 구출한다는 건 유비 세력의 한나라 재건 기본전략이기도 했다.

 

조조가 손권에게 손 내민 까닭

 

219년 5월 유비가 서촉을 완전히 평정하고 한중왕(漢中王)에 등극하자 관우는 행동개시에 착수했다. 관우의 대군이 범 같은 기세로 밀고 들어오자 조조는 대장 우금(于禁)을 보내 막게 했다. 우금 또한 명장(名將)이었지만 관우에 비해선 한 수 아래였다. 무릇 대장이라면 천문지리(天文地理)를 살펴 자연재해 등에 대비하고 이를 역이용해야 하지만 우금은 소홀했다.

 

정사삼국지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 등에 의하면 관우‧우금이 대치하던 중 한수(漢水)가 범람해 큰 홍수가 났다. 아무런 대비가 없던 조조군 태반은 물귀신이 되고 나머지는 포로가 된 반면 관우는 애초부터 수전(水戰)을 예상하고 군선(軍船)을 준비해둔 터였다.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어느 한 제방에 처량히 대피했던 우금은 형주군이 몰려오자 그대로 항복했다. 우금의 부장 방덕은 투항을 거부하다가 처형됐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關羽傳)은 “관우의 위세가 천하를 진동시켰다”고 기록했다.

 

믿고 보낸 우금이 그 지경이 되자 조조는 놀라 떨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안량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적 있었기에 더더욱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자라 ‘내 주머니에 네놈 목 있다’는 장비까지 온다면 결과는 어찌될지 불을 보듯 뻔했다. 그 와중에도 조조의 왕궁 소재지 업군에서 위풍(魏諷)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위나라 도처에선 난장판이 이어졌다.

 

정신 못 차리던 조조는 급기야 ‘천도(遷都)’까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거 역적 동탁(董卓)이 제후연합군의 창칼에 밀려 천자를 끼고 달아났던 것처럼, 조조도 ‘출세고 천하통일이고 나발이고’ 우선 살고 보자는 생존본능이 마구마구 샘솟았던 것이다.

 

천도는 곧 “나 관우 무서워서 도망간다”는 속내를 만천하에 광고하는 꼴이었기에 패망을 재촉하는 행위였다. 측근들은 필사적으로 말리면서 한가지 계책을 내놨다. 바로 강동(江東)의 손권(孫權)을 끌어들여 이 환란을 극복하자는 계책이었다. 이삿짐센터 불러 보따리 싸고 있던 조조는 그 말을 듣자 마치 술에서 깬 듯 얼굴이 환해지며 무릎을 탁 쳤다.

 

한 순간의 폭언으로 자멸한 관우

 

그도 그럴 만한 게 유비와 손권, 정확히 말하자면 관우와 손권의 관계는 당시 극도로 험악했다. 겉으로만 우방(友邦)이었을 뿐 두 사람의 사이는 웬만한 원수지간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원인은 관우의 ‘오만함’이었다.

 

앞서 벌어진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손‧유 연합군은 조조를 완벽히 격파했다. 남은 건 전후(戰後)처리였는데 특히 문제의 형주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승자는 유비였다. 일설에는 손권이 대국(大局)적 관점에서 형주땅을 유비에게 자진 양보했다는 분석도 있다.

 

사정이야 어떠하든 문제는 유비가 서촉을 점령하면서 보다 불거졌다. 양주(揚州), 그리고 변방 중의 변방인 교주(交州)를 가졌던 손권과 달리 유비는 형주‧익주(益州‧서천)라는 알토란같은 두 개 고을의 주인이 된 모양새가 됐다. 형주는 당대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서천에선 비단 등 초고가(超高價) 상품들이 생산됐다. 자연히 손권으로선 복부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손권 입장에선 “적벽에서 죽어라 싸운 건 우리인데 단물은 저 귀 큰 놈이 다 빨아먹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손권이 처음부터 조조와 손잡고 형주를 치려한 건 아니었다. 도리어 손권은 아버지 또는 숙부뻘인 관우와의 관계강화에 힘썼다. 관우가 북벌에 나서기 직전엔 사자(使者)를 보내 사돈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때 관우가 대뜸 내놓은 대답은 실로 ‘걸작’이었다.

 

“호랑이의 딸을 어찌 ‘개(犬)의 자식’에게 시집보내겠나” 이는 연의가 아닌 정사에 기록된 ‘실제 발언’이다.

 

실로 어마어마하게 모욕적인 이 욕설을 듣고 눈 뒤집어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리 성인군자(聖人君子)라 해도 없다. 그렇게 이를 갈던 차에 조조가 손 내밀고 손권이 정세(政勢)종합 끝에 결단함에 따라 관우‧손권 관계는 파국(破局)을 맞았다. 조정에 칭번(稱藩)한 손권은 여몽(呂蒙)을 보내 텅텅 빈 형주를 접수하게 했다. 철옹성(鐵甕城)이었던 형주는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설상가상 관우의 행군속도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조조는 맹장(猛將) 서황(徐晃) 등을 보내 관우를 막도록 했다. 서황은 참호‧녹각(鹿角) 등으로 겹겹이 둘러쳐진 형주군의 10중 방어선을 돌파하는 등 괴력을 발휘했다. 비록 밀린다 해도 형주에 돌아가 재정비할 수 있었겠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었다. 서천으로 도피하던 관우는 손권의 수하들에게 붙잡힌 뒤 아들과 함께 참수됐다. 그 수급은 조조에게 보내졌다. 일세(一世)의 영웅 관우는 그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한 순간의 실언(失言)으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목숨 잃고 말았다.

 

관우와 비교된 ‘유대도’

 

작금(昨今)의 우리 정치권은 길본의 난 등이 벌어진 위나라, 삼국이 피터지게 싸운 후한 말기처럼 어지럽기 그지없다. 서슴없는 폭언‧망언들도 관우의 ‘범딸 견자(犬子)’ 발언처럼 아무렇지 않게 난무한다. 16일 한 전직 당대표는 친정(親庭)을 향해 “죽은 정당”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해 당원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비단 해당 인물뿐만 아니라 귀를 의심케 하는 실언들이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신사(紳士)는 사라지고 신사(神祀)만이 있을 뿐이다. 국민 눈치를 보고 국민 뜻을 받들려 하는 민의(民意)의 전당이 아닌 동물의 왕국만 보인다.

 

관우처럼 큰 칼을 잘 써서 유대도(劉大刀)라는 별명이 붙었던 명(明)나라 장수 유정(劉綎‧1558~1619)은, 비록 막장이었던 명말(明末) 조정 때문에 사르후(Sarhu)전투에서 전사하긴 하지만, 그 자신도 도덕적으로 100% 완벽한 건 아니었지만, 관우와 달리 겸양지덕(謙讓之德)의 태도를 취해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으며 그 때문인지 천수(天數)에 가까운 수명을 누렸다. 17세기 유럽인 기준 평균수명은 51세였다고 한다.

 

유정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조선 지원군으로서 파병됐다. 조명(朝明)조정은 당시 우호관계였다. 일부 말 안 듣는 명군(明軍)장수들은 타국에서 노략질에 나섰지만 유정은 달랐다. 그는 도리어 조선백성들 구휼(救恤)을 위해 힘겹게 곡식을 운반해오고 제장(諸將)들을 엄히 단속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의하면 귀국 직전 선조가 몸소 잔치를 열어 노고를 위로하자 “감사합니다. 재차 왔지만 이룬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순신(李舜臣) 등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게 애석할 따름입니다”며 고개 숙였다.

 

“나 빼곤 다 바보”라는 태도와 착각은 공분(公憤)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천도(天道)를 어긴 자를 기다리는 건, 늦든 이르든, 그에 걸맞은 천벌이다. 국민 누구도 바보는 없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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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email protected]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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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DEX
    2023.06.17

    단기접전은 일본발 게임에서 흔하게 접할수 있는 표현인 일기토와 동의어입니다. 아무튼 경제학의 혁신주의(innovism)에서 우리는 인구의 밀집과 증가에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즉, 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융성하게 하는것은 결국 타인의 의견이란 것입니다. 분업과 전문화가 더욱더 깊어지고 서로에 대한 의존도가 과거보다 더욱 높아지고 중요해졌기 때문에 관우시대 이상으로 우리는 타인의 입장을 배려해야합니다.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6.17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고견 감사드립니다.

  • Mango

    칼럼에 쓰신 내용처럼 "나 빼곤 다 바보"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특히 요즘에 정치병자라고 이야기 하는 양쪽진영중에서도 극단으로 치닫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작금의 정치인과 지지자들의 행태를 정확히 꼬집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Mango
    오주한
    작성자
    2023.06.17
    @Mango 님에게 보내는 답글

    보잘 것 없는 제 필력이 경종을 울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