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밍(史明, Su Beng)
1918. 11. 9~2019. 9. 20
대만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혁명가로 본명은 스차오후이(施朝暉), 별명은 '오지상(歐吉桑, おじさん, 아저씨)'
1937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에 유학하던 중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했고,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지하정보원으로 활동했지만 1949년 비민주적인 당 운영에 대한 반발로 탈당해 대만으로 귀국함
국부천대 이후 국민당 독재정권이 외성인(중국 대륙에서 국민당 따라 대만으로 온 사람들)을 밀어주며 본성인들(명청 시절 대만에 정착한 한족들과 그 후손)을 차별했고, 2.28 사건까지 터짐.
이런 사건들을 겪으며 국민당이 공산당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 스밍은 1950년 자신의 동료들과 228사건 생존자 30여명 등을 모아 '대만독립무장혁명대(台灣獨立武裝革命隊)'를 결성해 독재자 장제스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움.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대만 북부 산악 지역들을 돌며 일본군이 남긴 소총 20자루를 수집했고,
타이페이 북부 양밍산(陽明山)에 숨어 산 기슭에 위치한 관저를 출입하는 장제스를 감시함.
하지만 1951년 총기들이 국민당 정부에 발각돼 계획이 무산됐고, 스밍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수배됨.
고향집에 숨어살던 그는 어느 날 집 앞에 중국 대륙 출신 여성이 땅콩을 팔고 있는 걸 보고 본능적으로 수상하다고 느꼈고, 또 다른 날에는 맞은 편 집에 대륙 출신 청년이 이사 오기까지 하자, 위험을 감지해 일본으로 도주하기로 결정함
지룽(基隆) 항구에서 몇 달 간 항만 노동자로 위장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1952년 5월 6일, 일본 고베행 바나나 수출선에 숨어 도주에 성공함
이를 안 국민당 정권은 바로 반란죄로 공개수배령을 내리고 일본 정부에 인도를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오히려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망명자로 인정해 보호를 해줌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한 스밍은 도쿄 이케부쿠로역 앞에서 노점상을 열어 면, 만두를 팔았고, 입소문을 타 돈을 많이 벌게 되자, 근처에 있는 5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서 중화요리 전문점 '신진미'를 차림.
이 음식점은 아직도 이케부쿠로에 남아 있고, 스밍 기념관 역할도 하고 있음
그는 음식점을 경영하면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음
자신의 식당을 재일 대만 독립, 민주화 운동가들의 거점으로 삼아 대만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는데 힘썼고
식당을 하면서 시간이 나면 도서관으로 가서 대만 역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함
그리고 식당 문을 닫은 뒤에는 밤을 새가며 대만 역사에 대한 글을 저술했고 1962년에 탈고했는데 그 책이 바로 대만 역사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 중 하나인 '대만인사백년사(台灣人四百年史)'
딱봐도 어마어마한 분량을 자랑함.
중국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 대만인들의 본토의식을 깨우기 위해서 바쁜 시간속에서도 저런 명저를 썼음.
1971년에는 일본에 건너온 민주운동가 정핑(鄭評)과 접촉해 장제스의 아들이자 당시 행정원장이었던 장징궈를 암살하는 작전을 계획했고 행동대원 훈련, 교육과 총기를 일본에서 대만으로 몰래 보내는 역할을 맡음
하지만 1974년 밀고자로 인해 계획이 탄로나 대만 내 행동대원들이 모두 체포당했고, 주동자인 정핑은 총살형당함
이후에도 대만 독립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유럽, 미국에 방문해 강연을 하며 대만 독립 사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함.
1987년 대만 계엄령이 해제됐고, 리덩후이 총통의 민주화 개혁 정책이 연이어 시행되자 1993년 귀국해 41년 동안의 망명생활이 끝남.
귀국 한 뒤에도 민진당 등의 대만 본토세력들을 지원했고
2014년, 대만 청년들이 국민당의 매국행위로 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입법원을 점거하자(해바라기 운동)
96세의 노구를 이끌며 입법원을 직접 찾아 해바라기 운동을 지지함.
2016년, 차이잉원 총통이 취임하자 총통부 자정(국정자문위원)으로 임명됐고
2019년 9월 20일에 서거하셨음. 향년 100세
평생을 대만의 독립 건국에 바친 스밍 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독립 건국의 그 날이 오기를!
台灣獨立萬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