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1979년 전두환의 군사쿠데타를 막으려했던 참 군인

지성인이라는착각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a664e12021d06f098b1e6ef5864c4c877c7f82cf748f9267fa3f3dcb493c408d05cb3c7cd91810b8e9d6cb75803296fdda3fb197726704ad01b48cfb13f.png.jpg


드라마 5공화국 중에서


장포스로 유명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군사쿠데타 소식을 듣고 진압에 나서려했으나 부하들이 배신하고 병력을 모두 끌고나가 

지휘할수 있는 실제 병력은 포병과 대전차병과를 제외하고는 없다시피했다

868ff76069d2e803899bd5a133bcac2d90f4e165b2226069c95bf30fb593e279824d8bf5f7a0410858388a1ae784f1844a144fd40975730dc60e3ad3fa.jpeg


결국엔 부대 주력이라 할수 있어서 믿고있던 전차부대마저 

모두 신군부쪽에 붙어 정면승부를 할 수 없게되자

부하들의 개죽음을 막기 위해 싸움을 포기하게 된다.

훗날 증언에 따르면 아직 지휘권이 남아있던 포병과 대전차병과를 이용해

신군부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던 경복궁으로 포격을 가하려 생각하기도 했으나

무고한 시민들이 포격에 휘말려 살상될수 있어서 결국은 포기했다고 한다

5034eb6ca1781c20b88cd5618ccb9d246cd2962501854214bfc419267a93cb29f72632f55028c357eb9db002f13145bb2ffb5ad6de88ee536683078138.jpeg

12.12직후 장태완 장군은 강제예편당했으며

장태완 장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올바르고 소신있는 일을 하다가 패하여 

반란군에게 모진 고초를 겪은데 분개와 통탄을 하면서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탄하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1980년 4월에 별세했다


그리고 1982년에는 외동아들 장성호(당시 20세)가 행방불명됐다. 

12.12 군사반란이 터질 때 장성호는 고등학생이었으며,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자연대에 들어갔고, 그 해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장성호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대문을 나선지, 

한 달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장태완은, 

본인이 두 사람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매우 슬퍼했다. 

부친의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전국을 유랑했고, 

아들이 죽은 후에는 "성호는 내가 죽인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잡아들이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두 사람과 같은 법정에 서기도 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이 때 장태완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386세대 국회의원들을 만나 

"12.12 쿠데타를 내가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러분이 그간 고생 많았다."라고 하기도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맡기도 하는등 활동을 하시다

2010년 7월 26일에 숙환으로 눈을 감았다. 

이때가 향년 78세였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1.jpg



서울 인근 부대의 장군들중 장태완장군과 함께

유이하게 신군부에 반기를 들었던 장군인 정병주 특전사령관

예전 실책으로 군복을 벗을 위기에 처한 박희도 그리고 최세창을 위해 

참모총장앞에 무릎까지 끓을 정도로 부하들을 친동생처럼 아꼇으나 

전두환 라인을 타고 출세에 눈이 먼 그들에게 결국 배신당했다

4개의 특전여단중 박희도, 최세창등 3명의 여단장이 배신했고

하나 남은 9특전여단을 서울로 올려 반란군을 진압하려했으나

신군부의 거짓말에 속은 육군본부 지휘관들에 의해 9특전여단은 부대로 복귀함으로서 

신군부를 막을 마지막 수단마저 없어지게 된다 


정병주 사령관은 배신한 부하들을 설득하며 

쿠데타세력에서 이탈할 것을 호소했으나 외면당했고

결국 자신이 자식처럼 아꼇던 박희도에게 체포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령관을 지키려 끝까지 저항하던 부관 김오랑 소령이 순직하게 된다


증언에 따르면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사령부로 쿠데타군이 진입했다는 소식에

총알을 챙기던 김오랑 소령에게 동료가 

지금 총을 들면 죽고 놓으면 산다

이미 다 끝났으니 그냥 포기하고 목숨이라도 건지자고 하자

그러면 사령관님이 위험해집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사령관을 지키러 갔다고 한다

30.jpg


이후 장태완 장군과 함께 강제예편 당했으며

강제예편된 이후 그는 꾸준히 12.12 사태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1988년 10월 16일 밤 10시에 그는 행방불명되었고 

결국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에 송추 인근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국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으나, 

정병주 소장과 친분이 깊었던 장태완 소장은 계속해서 그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을 해 왔다. 

고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데 가톨릭 교리에서 자살은 용서받지 못 할 큰 죄 중 하나이며. 

살벌한 제5공화국 때에도 장태완 장군을 만나면 

12ㆍ12의 진실을 밝힐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 조심하자고 말하는 등 

자살을 택할 인물도, 정황도 아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댓글
1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