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크의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충격을 넘어선 무언가가 내재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 종교적 교의와 추상적 이론이 빚어내는 정치적 파국, 법절차를 통해 다양한 이해가 변화로 수렴되는 과정에 대한 신뢰, 그리고 신중한 정치적 리더십을 통해 갈등을 조정하고자하는 의지가 담겨있었던 것이다.
1789년 8월 9일, 바스티유(Bastille) 습격사건이 발생하고 3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고향의 세습 귀족이자 당대 대표적 지성인이었던 제임스 콜필드(James Caulfield)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오늘날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는 정치사상가 버크가 프랑스혁명에 대해 밝힌 처음이자 가장 솔직한 견해를 담고 있다.
프랑스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놀라움을 가지고 응시하면서, 영국은 비난을 해야 할지 아니면 찬사를 보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비록 내가 생각하기에 수년 동안 이와 같은 일이 진행 중이었지만, 진정 이 일은 역설적이고 기이합니다. 그 정신(spirit)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지만, 파리 사람들의 낡아빠진 폭력성(ferocity)이 충격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갑작스러운 폭발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사건이 보여주는 특별한 조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파리 사람들의 기질(character)이라면, 이 인민들은 자유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전 지배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반드시 강력한 힘(a strong hand)이 그들을 강제해야 합니다.1)
버크는 견고한 헌정체제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신’(spirit)만큼이나 ‘지혜’(wisdom)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프랑스인들이 그들 중에 지혜로운 지도자를 갖고 있는지, 만약 그들이 그러한 지도자들을 갖고 있다면, 그 지도자들이 그들의 지혜에 걸맞는 정치적 권위를 갖고 있는지 아직 알 수 없다.”라고 덧붙인다.2)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가 이후 프랑스 혁명에 대해 가진 부정적인 입장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크의 현실주의 정치관을 인민의 집단행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물론 그가 프랑스 혁명을 ‘몽매하고 잔혹한 열정이 이끄는 전제(專制)’라고 비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국의 미국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에서 보듯, 그는 집단저항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가진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적 미학에 의거한 판단의 잣대가 있었고, 이러한 잣대는 프랑스 혁명을 둘러싼 영국 사회의 치열한 논쟁을 넘어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제시하려던 노력의 결실이었다.
주목받지 못한 정치인
버크는 1729년 1월 12일,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에서 태어났다.3) 그는 12세기 말 헨리 2세(Henry II)의 아일랜드 정복 때에 아일랜드 서쪽 골웨이(Galway)에 진출했던 노르만 버그(de Burgh)의 후손이었고, 그의 집안은 이후 리머릭(Limerick)에 정착해서 1646년 시장을 배출하는 등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유력 가문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영국 내란 시기에 왕당파의 일원으로 인민 폭동의 표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재산과 직위를 비롯해 많은 것을 상실하는 불운을 겪었다.
버크의 아버지 리처드(Richard Burke)는 변호사였다. 그는 증조부 시기부터 정착했던 코크(Cork)를 떠나 더블린에 자리를 잡았고, 활발한 활동으로 명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기울었던 집안도 다시 일으켰다. 그의 아내 메리(Mary Burke)는 제임스 2세(James II)의 법무상을 역임했던 리처드 네이글(Richard Nagle) 가문의 자손이었고, 둘 사이에 15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대부분 병사하고 3남 1녀가 남았다. 개신교도였던 그는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했고, 그의 자녀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버크는 살아남은 자녀들 중 둘째였다. 그는 1744년부터 1748년까지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TrinityCollege)에서 수학했고, 다른 형제들처럼 법조인이 되기 위해 1750년 런던 법학원(Middle Temple)에 입학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에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1755년부터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1756년에 첫 저술인 『자연적 사회의 옹호』(A Vindication of Natural Society)를 출간했고, 1757년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로 지식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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