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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란의 역사 : 아케메네스 왕조를 중심으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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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로렌츠

칼럼 https://theyouthdream.com/free/4316701

 

 

11.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페르시아의 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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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아케메네스 군주들 중에 가장 오랜 세월을 통치한 황제입니다. 무려 45년간을 통치했죠.(크세르크세스의 암살 시점 차이에 따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할아버지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더 오래 재위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그가 업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선대의 샤한샤(왕 중의 왕이라는 뜻이며 페르시아 황제의 공식 칭호이다.)들처럼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그리스의 패권을 잡을 수 없게 한쪽이 우세해지면 대립하는 세력을 후원함으로써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스파르타가 아나톨리아에 원정왔을때 반 스파르타 도시국가들에게 자금을 살포해서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를 공격해 스파르타를 물러가게 하고,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에게 평화를 구걸하게 만들죠. 그의 치세에  이오니아와 키프로스 같은 상실지를 수복하는데 성공합니다만, 거기에 그치고 맙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이집트를 수복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모두 실패하고 맙니다. 기원전 385년, 기원전 383년, 기원전 373년의 시도가 모두 실패하죠. 대표적인 사례인 기원전 373년의 사례를 보면, 기원전 373년에 페르시아는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다시금 재침공하나, 이집트는 페르시아를 훌륭히 막아내었고, 이는 황제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융해되고 있었던 각 총독들의 협력은 이집트 원정 실패로 인해 가시화되었고, 급기야 지방 세력들이 그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맙니다. 지방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이집트와 소아시아 총독들, 그리스까지 가세해 위기는 한층 커지기만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 정부의 명령을 지방 세력이 잘 듣지 않는 건 당연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군대를 모으기 위해 각 사트라프들에게 이권을 떼어다 줄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또다시 왕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이었습니다.

 

 

그러나 반군들은 진압당하게 되는데 이는 황제의 유능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반 페르시아 세력들의 단결과 협조가 결여되어 있던 탓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반군세력들의 손발이 따로논 덕분에 진압이 가능했죠. 또한 황제는 반란을 일으킨 사트라프들을 모두 용서했는데, 이는 황제가 그들을 모조리 처형한다면 계속해서 반란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들과 대립하는것을 두려워했던 것이죠.

 

 

그의 이러한 조치는 당장이야 제국이 온전해 보이게 하는 데 그쳤지만 결국 제국의 응집력을 약화시켰고, 훗날 알렉산드로스가 침입했을 때 제국이 빠르게 무너져버리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애초에 황제 자신이 치세 전반에 걸쳐 선대들이 펼쳐오던 관용 정책의 연속성을 내팽개쳐버리고 국정에 무심하니 지방세력의 성장을 불러오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고, 군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돈이 드니 결국 군대를 내세워 고세율로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이 제국의 관행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수탈해 버리니 민심이 악화돼서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시기 일반 민초들의 삶은 비참하였는데, 그의 실정으로 말미암은  중앙 권위의 악화와 그로 인한 관개 시설의 낙후는 제국 농토의 생산성을 하락시켜 소출이 감소되었고, 곡창지대인 이집트의 상실은 제국의 경제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지방 세력의 강화와 각지에 만연한 부정부패, 잇따른 반란 역시 제국에 상처를 늘려갔죠. 이런 상황에서 민초들의 삶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지고한 위치에 있는 황제인데도(심지어 그의 즉위명 아르타크샤샤는 하늘의 법칙에 속하는 국가의 주인이다.) 되는일이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애초에 황제가 되어선 안돼서였을까요. 그는 마약에 중독되었고, 젊은 시절부터 워낙 여자를 밝혀서 "350명"의 아내를 두고 그들에게서 무려 "115남 85녀" 도합 "200명"의 자녀를 두는데요. 

 

 

 

당연하게도 이들에게 영지를 주었고 이게 국가에 도움이 될리는 만무했습니다. 제위계승권을 가지고 다투었으니까요. 무려 200이나 되는 플레이어가 황위를 위해 다투는 것은(황녀들은 각각의 황자들을 지지하여) 제국에게 압력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죠. 또한 황제 자신도 말년에 치세 전반에서 실정을 저질러서 불난집에 기름을 끼얹고 말았습니다. 경제 정치 군사 종교 전 분야에 걸쳐 실정을 저질렀죠.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진 노황제는 궁중 암투에 걸려들어 가장 유력한 계승자인 장자 다리우스를 처형해 버리게 되는 패착 또한 저지르게 됩니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장자는 아버지가 너무 오래 황위를 지키고 있어서 아버지를 암살하고 황제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계획이 진실이라면 정당한 심판이 되겠으나, 그 진위여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누설되었고 장자는 처형당하게 되죠. 그가 정말로 아버지의 암살을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함이었건, 진실이었건 그는 처형당합니다. 그 다음 황위 계승자는 아리아스페스였는데, 그는 모종의 이유로 자살하게 됩니다. 낙심한 황제는 넷째 아들 아르사메스를 계승자로 세우지만 그 역시 살해당합니다. 늙은 왕은 비통해하며 궁중 암투의 승리자인 셋째 아들을 계승자로 세웠고, 이내 붕어하게 됩니다. 셋째 아들은 제국의 혼란을 잠재우게 되는 군주로서 세계사에 등장하는데, 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입니다.

 

 

 

12. 잔혹하고 유능한 황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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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황위에 오른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가장 먼저 자신의 정적들인 형제자매들과 황실 구성원을 전원 처형합니다. 수백명이 죽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권력의 분산을 막는 데에 효율적이었지만, 왕조가 망할 때에 앞으로 내세울 수 있는 황실 자손의 씨를 말려버리는 결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샤한샤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을 때, 제국은 그야말로 균열이 심한 도자기였습니다. 중앙 권위는 유명무실해졌으며 사트라프들은 점점 권력이 강화되었고 사트라프직을 세습하여 힘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지방 권력이 점진적으로 상승하게 되었죠. 이 모든 것들을 내버려 두면 훗날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방 세력의 반란과 왕조의 전복 말입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를 좌시하지 않았으며 정면 승부를 통해 지방 세력을 격파했습니다. 먼저 카스피 해 인근의 카두시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소아시아의 사트라프들의 반란 역시 진압합니다. 반란을 진압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수사로 돌아와서 내부 개혁을 단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재정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351년에 이집트로 향하는데, 광대한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하였으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집트 전역의 실패는 페니키아의 반란을 불러일으켰고, 황제는 이를 진압해야 했습니다. 모든 반란을 진압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43년, 마침내 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데요. 

 

 

 

이번엔 기원전 351년에 실패했던 이집트 전역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었습니다. 페니키아 반란을 진압하는데 동원한 보병 30만, 3만 기병, 500척의 수송선은 그대로 이집트 전역에 동원되었으며, 추가적으로 그리스 용병 1만 4000명을 동원해 총 34만 4000이 넘어가는 대병력이 이집트를 멸하기 위해 진군했습니다. 이집트 역시 국가의 명운을 걸고 총력전에 나서는데요. 

 

 

이집트인 6만 명과 그리스 용병 2만 명으로 구성된 8만의 군대가 페르시아군에 맞섰습니다. 페르시아 군대의 숫자가 정말로 34만 4천인지는 모르겠으나, 10만이 넘었을 것임은 확실하겠죠. 압도적인 페르시아군은 기원전 343년 펠루시움에서 이집트 군을 섬멸했습니다. 마침내 부유한 나일강 삼각주가 페르시아 제국에 다시 정복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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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루시움에서 페르시아는 이집트 군대를 패주시켰다>

 

 

황제는 다시는 이집트가 반란을 꾀하지 못하도록 이집트를 약탈했는데, 성벽이 파괴되었고, 사원이 약탈당했으며, 이집트 토착 신앙과 그 신자들은 박해받았습니다. 또한 이집트 지역에 높은 세금을 물려 이집트를 약화시키죠. 성공적인 정복을 마무리한 황제는 마침내 페르시아로 귀환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성공적인 군사 활동은 주변 세력들에게 제국이 다시 돌아왔음을 공언하는 것이었으며, 제국이 옛 영토를 수복할 힘과, 드넓은 영토를 통치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국은 다시 본래의 거룩한 지위를 존중받았습니다. 

 

 

페르시아 해군은 재건되었으며, 에게 해의 제해권 역시 되찾았습니다. 건방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감히 제국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고, 이는 아테네의 이소크라테스의 야만인에 대한 전쟁을 호소하는 연설이 무시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았으며, 제국에 맞선 가장 강력한 세력인 이집트도 무릎꿇었죠. 그러나 서쪽에서 야금야금 세력을 키우고 있는 마케도니아는 그의 눈에 거슬렸고, 황제는 반 마케도니아 세력을 지원하라고 명령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제국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하게도, 환관이자 재상인 바고아스의 음모로 독살되었습니다. 그가 없는 제국에는 훗날 서쪽에서 불어오는 거대한 광풍이 휘몰아칠 것이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기의 통치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제국의 멸망을 유예시킨 것 뿐일 따름이었죠.

 

 

 

 

 

13. 환관 바고아스의 전횡과 다리우스 3세의 즉위

 

 

환관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기 환관이었는데, 능력이 출중하여 재상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황제를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그의 아들 아르세스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로 옹립시키는데요. 꼭두각시 황제였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는 바고아스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지만 그 역시 바고아스가 독살시켜서 2년의 짧은 치세만을 다스리고 퇴장하게 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마저 제거에 성공한 바고아스는 방계 황족을 황제로 옹립하는데, 그가 바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다리우스 3세입니다.

 

 

 

14. 비운의 황제, 다리우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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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3세>

 

 

방계 황족이었던 다리우스 3세가 황제가 되었다는것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피비린내 나는 황실 숙청의 강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여하튼 새 황제인 다리우스는 절대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바고아스는 다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꼭두각시로 조종하려 했지만 다리우스는 바고아스를 제거할 생각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고아스는 다리우스를 독살하고 본인이 황제가 되고자 했으나 다리우스는 연회에서 자신에게 독배를 권하는 바고아스의 입에 술잔을 쑤셔넣어 바고아스를 제거하는데 성공합니다. 

 

 

 

황제로서 다리우스의 초기 행보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고 이를 훌륭하게 완수해냅니다. 또한 페니키아를 길들이는데도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선황제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페니키아의 반란을 진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있거니와, 그의 시대 이전부터 페니키아는 식민도시 카르타고의 성장으로 점점 힘을 잃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페니키아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페르시아 당국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페니키아는 제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제국의 충성스러운 영토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외에 다리우스 3세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다리우스 자신은 우리를 위해 비문을 남기지 않았으며(비문을 남길 시간도 없었지만), 그의 짧은 치세를 볼 때 그의 통치 기간의 대부분이 제국의 권력다툼과 혼란을 안정시키는 데 소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서쪽에서 페르시아인들의 세계를 이지러지게 할 폭풍이 휘몰아쳐 오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침공 말이죠. 과연 페르시아를 단숨에 멸망시킬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가 혼란을 수습하던 사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15. 전쟁의 신 알렉산드로스, 역사에 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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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제>

 

 

알렉산드로스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 사령관들 중 하나로서, 아직까지도 전 세계인들에게 회자되는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자국과 수십배의 체급차가 나는 세계 최강의 국가를 상대로 수십회의 전투를 벌여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모두 승리해서 신속하게 정복해버렸으니까요. 알렉산드로스와 같이 압도적인 대제국을 홀로 완전히 멸망시키고 정복한 업적은 알렉산드로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압도적인 대제국과의 싸움에서 수십회의 승리를 거머쥔 업적은 존재해도요. 알렉산드로스는 고작 8년 만에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해버리는 기염을 토했죠. 

 

 

왕자시절부터 군사령관으로서의 재능을 뽐낸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 필리포스의 의문스러운 암살로(아마도 그와 그의 어머니가 주도했을) 스무살의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신속하게 형제들과 반대파를 처형하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트라키아를 정벌하여 페르시아로 건너가기 전에 국경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습니다. 또한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도시국가들을 평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테베는 도시 자체가 삭제되기에 이르죠. 그리고 나서 기원전 334년, 스물두 살의 알렉산드로스는 다수의 마케도니아인들과 소수의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수만의 연합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트(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페르시아령 소아시아에 발을 내딛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대는 처음부터 사정이 좋지 못했는데, 본국에서 가져온 식량과 봉급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마케도니아는 거대한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재원을 소모했고,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시절부터 이미 빚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기름을 부어 버린 것이 알렉산드로스인데요. 

 

 

그는 즉위 이후 신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마케도니아 시민의 의무는 군역뿐임을 선언하여 인기를 얻었습니다. 당연히 재정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전쟁을 감행했고, 이미 페르시아로 오기 전부터 재정을 많이 소모하였는데,  트라키아 원정에서 적자가 난게 그것이죠. 트라키아인들은 딱히 부유하지도 않았고 배후 안정을 위해 친 것이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이익을 보기는 요원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숨통을 틔워준 것은 테베를 점령하고 파괴할 때인데,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모조리 노예로 팔아서 숨을 고를수 있었다고 봐야겠죠. 그러고 나서 그는 페르시아 원정 준비에 착수하는데, 국가의 명운을 걸고 사용가능한 모든 재원을 원정 준비에 투입하고, 왕실 재산마저 처분했는데, 왕실 토지를 담보로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서 급전을 마련하는 것으로 원정 준비를 마칩니다. 다음의 기록에서 그 사실을 포착할 수 있는데요.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어느 중요한 도시를 함락했다거나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금도 기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투덜거렸다. "이러다가는 아버지한테 일을 다 뺏겨서, 우리는 크고 빛나는 사업도 못하고 말겠어."

쾌락과 돈보다는 영광과 명성을 더욱 갈망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토가 넓어질수록 자기가 정복할 땅이 적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결코 안일한 생활과 호사스러움이 보장되는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외적을 가진 나라의 왕위를 계승받아 용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군대는 보병 3만 명과 기병 4천 명이었다는 설도 있고, 보병 4만 3천 명 그리고 기병 3천 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아리스토불로스의 설에 의하면 그는 70탈렌트 정도의 군자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두리스의 설로는 군량미 30일 분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오네시크리토스는 당시 알렉산드로스에게 2백 탈렌트의 빚이 있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어쨌든 대규모적인 계획의 준비로서는 변변치 못한 준비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의 일이 염려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어떤 자에게는 많은 토지를 주고, 어떤 자에게는 한 마을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구를 주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신분에 맞도록 각각 재산을 나누어 준 다음에야 군비를 수송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라고 그는 대부분의 왕실 재산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그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남겨 놓으셨습니까?" 

 

알렉산드로스가 대답했다. "희망".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말했다. 

 

"그럼 대왕을 모시고 떠나는 저희들도 그 희망을 나누어 갖겠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 2(완역본) 중에서)

 

 

 

이와 같이 급전의 대가로 돈을 제공한 귀족들은 왕실 재산을 갈라먹었고, 페르디카스와 같은 최측근들은 왕실 재산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돌려말하는 것이 위 기록의 내용이죠. 마케도니아가 빚까지 져가며 국가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원정을 준비했다는 것은, 이 원정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마케도니아는 돌이킬수 없는 타격을 입고 몰락하게 되는 것임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게 총력을 다했는데도 연합군은 봉급과 식량이 얼마 되지 않아 빠르게 한 판 승부를 봐야되는 상황이 강제되었고, 알렉산드로스의 원대한 원정은 언뜻 무모한 듯 싶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페르시아 제국에는 이에 대처할 자원이 풍부했습니다. 로마 제국보다도 드넓은 영토와, 험준한 고원들과 사막, 산지들은 방어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거대함과 자연 자체가 알렉산드로스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었죠. 그 외에도 제국의 넘처나는 자금과 병력은 많은 수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의미였으며 알렉산드로스를 압도하기에 충분을 넘어서 과한 수준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군량도 얼마 없고 군인들에게 지급할 봉급도 얼마 없는 상태에서 독소전 당시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보다 더 광활한 거리를 행군하여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 엑바타나, 파사르가다에, 바빌론,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었죠. 물론 그 사이에 대기하는 수십만의 군세를 꺾는것은 당연하고요. 누가봐도 미친 짓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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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 베를린과 모스크바까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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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수도 펠라에서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까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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