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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조선사> 015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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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제1대 태조

 

정도전은 강력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보다는 군신이 조화를 이루는 재상 정치를 실현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왕족과 훈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이전 세대에는 없었던 과감한 개혁을 추친해나갔다. 

 

뛰어난 능력과 이성계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정도전에게 불가능이란 보이지 않았다. 개혁의 시작점은 1392년(태조1년)에 설치한 의흥삼군부를 통해 사병제를 혁파하고 국가가 병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의홍삼군부 설치 과정에서 사병을 보유한 왕족과 훈신, 그리고 무장 세력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위한 진법 훈련 강화를 명분으로 삼아 개혁을 멈추지 않았다.

 

반면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이며 스스로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으나 개국공신에 책봉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복형제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고, 정도전이 사병을 폐지하려 하자 이방원은 큰 위기감을 느꼈다.

 

1398(태조7년), 태조가 병으로 눕자 정도전이 신의왕후의 여러 아들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방원과 그의 추종세력은 정도전이 자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꾸민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궁문 앞에 불이 켜져 있지 않은 것을 보자,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하고 정변을 준비했다. 

 

그러나 정변을 일으키키로 한 당일에 참여한 사람이 매우 적었다.

 

하륜이 추천한 이숙번을 비롯해 이거이 / 조영무 / 민무구 등이 참가했지만 그 수가 총 40여 명이 안 되었다.

 

나중에 합세한 인원을 합쳐도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무기도 부족해 몽둥이만 들고 쫒아온 이도 10여명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머릿수에 연연하지 않고 광화문 앞으로 달려나갔다. 반면 세자 방석은 반정군이 남산까지 꽉 들어찼다는 잘못된 정보에 전의를 상실하고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방원이 이끄는 반정군은 정도전 일행이 남은의 첩 집에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곧바로 그곳으로 급습했다. 심효생 등이 현장에서 피살당하는 틈을 타 정도전은 민부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곧바로 발각된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다 죽었다. 이방원은 난을 일으킨 이유로 "정도전과 남은 등이 어린 서자를 세자로 꼭 세우려고 나의 동모 형제들을 제거하려 하므로, 먼저 선수를 썼다."라고 밝혔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세자의 자리에서 쫒겨난 방석은 귀양을 가는 도중 살해되었다. 얼마 뒤 다른 이복형제인 방번도 죽었다.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권력을 위해 형제를 죽였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둘째 형 방과를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했다. 

 

태조 이성계도 이를 받아들여 방과를 세자로 책봉하고, 한 달 뒤 왕위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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