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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우원식 당선의 의미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폭주기관차가 반감 사는 건 당연지사

 

모용희(慕容熙‧생몰연도 서기 385~407)는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후연(後燕)의 마지막 황제다. 각종 기행(奇行)‧범죄‧막장짓 일삼다 고구려계에게 처단 당한 인물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 의하면 모용희는 어려서부터 노란 싹을 과시했다. 선제(先帝) 붕어(崩御) 후 많은 벼슬아치들은 다른 이를 새 황제로 세우려 했다. 그럼에도 모용희가 옥새(玉璽)를 꿰찬 배경에는 태후(太后) 정 씨(丁氏) 즉 ‘형수’와의 ‘간통’이 있었다. 모용희의 출중한 테크닉에 감탄한 누님은 어딘가에 용한 복점이 있을 수도 있는 모용희를 나라의 새 주인으로 적극 밀어줬다.

 

권력자가 된 색욕마인(色慾魔人)은 거침없이 폭주했다. 모용희는 우선 당대의 미인이던 부융아(苻娀娥)‧부훈영(苻訓英) 자매를 후처(後妻)로 맞이했다. 질투심에 눈 돌아간 정 씨는 측근과 함께 모용희를 폐위시키려 기도하다가 발각돼 인생이 찢어졌다. 동생 부훈영은 기어이 황후(皇后)에 봉해졌고 언니 부융아는 소의(昭儀)에 책봉됐다.

 

모용희는 자매를 위한다며 마구 나라살림을 거덜 내고 부정축재했다. 대토목공사를 일으켜 용등원(龍騰苑)을 짓고서 그 안에 경운산(景雲山)‧곡광해(曲光海) 등을 조성했다. 건축에 동원된 군민(軍民)은 산을 쌓고 바다를 만드느라 초주검이 됐다. 이들은 검수원복을 외치며 쓰러져갔다. 나랏돈은 빛의 속도로 탕진됐으며 자연히 세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부 씨 자매는 수시로 민가(民家)를 쏘다니고 초밥에 샌드위치를 먹어대 백성들은 그 법인카드 비용을 혈세로 대느라 등골이 휘기도 했다.

 

천벌을 받았는지 언니 부융아는 404년 몹쓸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러자 모용희는 부융아를 치료했던 왕온(王溫)이란 사람의 사지를 자른 뒤 분사(焚死) 즉 불태워 죽였다. 동년 겨울 모용희‧부훈영은 대규모 사냥에 나섰는데 동원된 병사 수천 명이 맹수에게 물려가거나 얼어 죽었다.

 

모용희는 전쟁 원정길에도 부훈영을 끼고 다녔다. 405년 모용희는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을 전격 침공했다. 명(明)나라 말기의 학자 풍몽룡(馮夢龍)의 고금담개(古今譚槪) 등에 의하면, 비록 천 년도 더 지나 나온 주장이라 진위여부가 불투명하긴 하지만, 성이 함락되려 하자 모용희는 오직 부훈영을 위한답시고 다음과 같은 기가 막힌 명을 내렸다.

 

“황후가 신나서 늬들보다 먼저 입성하고 싶다고 하는구나. 짐(朕)이 특별히 명하노니 우리 부부가 도착할 때까지 너희 천한 것들은 아무도 성내에 진입 말라!” 덕분에 일껏 땅굴 파고 피 터지게 싸워 요동성을 차지한 후연군(後燕軍)은 손가락만 빨면서 고구려군이 터널을 메워버리는 걸 지켜봐야 했다. 요동성 투어하려다 개구멍으로도 못 들어가게 된 모용희‧부훈영은 하릴 없이 군사를 물려 퇴각했다.

 

모용희의 막장 독주는 계속됐다. 체면 구긴 그는 405년 12월 군사를 이끌고 이번엔 거란(契丹)을 공격했다. 이번 출정에도 부훈영은 동행했다. 그런데 국제적으로 이름 떨치던 북방 마피아들이 성난 표정으로 인상 한 번 쓰자 모용희는 “실은 우리 거란에 대북송금해드리려 찾아뵌 겁니다. 스위스은행 계좌번호 좀... 전 집에 가스불 켜두고 나온 것 같아 이만...” 공손히 돌아가려 했다.

 

부훈영은 “자기 이런 사람이었어? 실망이야” 돌아앉았다. 오기가 발동한 모용희는 “돌아간다 했더니 진짠 줄 알더라” 달래며 무려 3천리를 내달린 뒤 뜬금없이 만만하다 여긴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을 들이쳤다. 장거리 마라톤에 지쳐 쓰러진 후연군은 고구려의 맹공 앞에 박살이 났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역격을 가해 406년 무려 후연의 수도 용성(龍城)을 정복하고서 수많은 포로를 끌고 갔다.

 

이듬해인 407년 부훈영은 더러운 평화가 이기는 전쟁보다 낫다며 언니를 따라 갔다. 큰 슬픔에 빠진 모용희는,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내용이므로 자제 또는 보호자 지도를 부탁드린다, 관 뚜껑을 열고서 이미 염습까지 끝난 아내의 몸뚱이를 꺼내 시간(屍姦)했다. 그리고는 부훈영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는 자들을 전국에서 모조리 색출해 처벌했다. 모용희는 부훈영의 무덤에 순장(殉葬)하고자 애꿎은 형수를 살해하기도 했다.

 

아들 모용희의 막장짓에 질려버린 단 씨(段氏)는 태후 자리도 차버린 채 출궁해버렸다. 만조백관(滿朝百官)과 천하만민(天下万民)도 “더는 못 참는다” 외치며 반란표를 던졌다. 고구려계인 모용운(慕容雲‧본명 고운)이 장수 풍발(馮跋)에 의해 모용희의 대항마로 추대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모용운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한 모용희가 반란 진압에 실패하자 그를 따르던 병사들마저도 끝까지 수행하는 대신 뿔뿔이 흩어져버린 게 이를 뒷받침한다. 자신이 만든 용등원으로 홀로 달아난 모용희는 비희계(비 모용희계)에 의해 단칼에 참수됐고 새로이 북연(北燕)이 들어섰다.

 

더불어민주당의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경선에서 우원식 의원이 추미애 경기 하남갑 당선인을 꺾고 승리하는 이변(異變)이 발생했다. 추 당선인이 ‘명심(明心)’을 업었다는 분석이 당초 팽배했기에 비교적 계파색이 옅다는 우 의원의 당선은 모두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이러한 경선 결과를 두고 친명계 폭주에 지친 비명‧무계파 인사들이 친명계에 대거 반기 든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실제로 민주당 내에선 “한 사람 황제로 모시는 당 꼬라지 걱정(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 등 쓴소리가 봇물을 이룬다. 물론 우 의원이 향후 친명계 폭주에 협력할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정확한 경선 내막을 알 순 없지만, 이번 선거가 친명계에 경종(警鐘) 울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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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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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주한
    작성자
    2024.05.17

    광개토대왕의 406년 후연 정벌이 실제 있었는지 애매하네요.. 저는 어디까지나 역사를 좋아하는 아마추어이기에 일부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학교 공부는 교과서 위주로.. 감사합니다

  • Mango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나 한명만 보고 달려가는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팬덤정치가 극에 달하고 있는데 이를 타개할 방법이 있을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