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지평리 전투’ … 트루먼, ‘휴전’위해 맥아더 전격 해임 … 이승만, “목숨 걸고 휴전 결사반대” 첫 선언 … “화천발전소 확보하라” 파로호 '살수대첩'!

뉴데일리

1.4후퇴후 밀리던 유엔군은 총반격에 나섰다. 워커 8권사령관 후임 리지웨이 장군은 이승만에게 약속한대로 1월 15일부터 ‘늑대사냥개 작전’(Operation Wolfhound)을 펼쳤다. “미군의 패배주의부터 청소하자” 일방적 후퇴작전을 계속하다보니 패배주의가 만연한 미군을 보자 리지웨이가 펼친 강압작전,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몰려온 중공군을 오산-수원까지 밀어 올리는데 성공한다. 그 결정적 전투가 바로 ‘지평리 전투’였다.

▶지평리 전투◀경기도 양평 지평리(砥平里)에서 2월13~15일 벌인 혈전은 미2사단 23연대와 프랑스군 1개대대의 합동작전, 지평리전투는 인천상륙작전 및 용문산전투와 함께 6.25전쟁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은 3대전투로 평가된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처음으로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유엔군은 반격의 전환점을 만들었으며 다시는 중공군의 남진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 대대장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1892~1964) 대령이 이끈 기막힌 전략전술을 보자. 세계1-2차대전에서 용명을 떨친 뒤 중장으로 예편하였다가 한국전에 대대병력을 파견하게 되자 대대장이 되려고 스스로 중령으로 계급을 낮춰 대대장을 자원한 59세 노장이다. 히틀러의 나치시절 레지스탕스 투쟁를 벌였던 그의 본명은 마그랭 베르느레(Raoul Charles Magrin-Vernerey)였다.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이던 프랑스가 영국과 비슷한 규모의 파병 압박을 받았을 때 국방부가 주저하는 것을 보자 외인부대 감독관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전 파병을 적극 주장하고 나섰다.."부대가 창설되면 내가 대대장을 하겠다"며 국방부를 설득, "중령도 좋다.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 온 몸이 곧 태어날 자식에게 내가 프랑스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파비앙 몽클라르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 나의 아버지 몽클라르 장군] 한국에너지법연구소, 2013)

지평면 지평리는 8개의 고지로 둘러싸인 분지, 꼼짝없이 포위된 미군과 프랑스대대는 피리소리와 함께 기습하고 사라지는 중공군이 귀신인지 물거품인지 종적을 알 수 없어 당황한다. 그때 몽클라르는 적의 작전을 알아챘다. 피리소리 꽹과리 소리는 심리전의 무기일 뿐만 아니라 작전명령을 내리는 지휘신호라는 것을! 그는 ‘휴대용 수동식 사이렌’을 마련하여 맞불을 놓았다. 피리소리가 울리면 더 크게 사이렌을 울린다. 갑자기 신호소리를 못 듣게 된 중공군은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 흐트러졌다. 이때다! 지원 나온 미군 연합포병단이 불의 세례를 퍼부었고 미-불 연합군은 일제히 진지를 박차고 나가 치열한 백병전을 벌여 일방적 승리를 거머쥔다. 한국 카투사 1백여명도 함께 피를 흘렸다. 중공군은 미-불 1개연대를 잡으려던 3개사단 3만 5천여명이 전멸한다.

“미군이 드디어 패배주의를 벗었구나” 지평리 장병들을 찾아 격려한 리지웨이는 이를 계기로 ‘천둥벼락작전’(Operation Thunderbolt)을 강행, 뒷날 ‘제2의 인천상륙작전’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대승을 거두고 나서. 잇따라 38선 이남의 중공군을 휩쓸어내는 ‘총괄작전’(Operation Roundup)까지 확대해나간다. 유엔군은 3월14일 드디어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말까지는 남한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군사국방연구소 [한국전쟁] 1996)

도쿄에서 날아 온 맥아더는 “아무도 우리를 바다로 내몰지 못할 것”이라며 작전을 독려하고 ‘만폭’(만주폭격) 허용을 다시 촉구하였다. “중공군의 도피처 한국국경에 대한 폭격이 불가능하여 전쟁에 지장이 크다”며 한국 전쟁의 장래는 유엔의 만주폭격 허용 결정에 달렸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전선에서 달려와 이승만을 찾은 맥아더는 장담했다.“만주에 대규모 폭격을 가해 적의 후방기지를 섬멸하여 다시는 공산도당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겠으니 걱정 말라”그러나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미합참의 지침대로 ‘캔자스 라인(Kansas Line:문산~전곡~양양) 전선을 지키며 그 이북의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 양양은 이번에도 국군이 먼저 38선을 돌파하여 탈환한 것이었다.여기서 “38선을 넘어 북진을 하느냐 마느냐” 또 다시 38선 논란이 재연된다.

◆이승만, 무초 대사에 “저 자를 내쫓아버려!”

“한국전쟁에 개입하고 있는 미국과 유엔의 결정을 보면, 우방의 어떤 나라 지도자도 한국을 구출하는 것이 그들의 참전목적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프란체스카는 이승만대통령이 맥아더의 손을 굳게 잡고 “조국분단과 민족 이산의 비극을 반드시 끝내겠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남편 모습에 가슴을 졸인다. 영국은 38선 돌파에 제동을 걸었으며, 미국은 각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한국군의 38선돌파 사실까지도 부인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때 무초 대사가 경무대에 들어와 “38선 돌파에 대한 정치지도자들의 결정이 곧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쳐다보지도 않고 방을 나갔다.“저 자를 당장 내쫓아 버려!” 프란체스카에게 버럭 화를 낸 이승만은 전날 양성봉 경남지사가 가져다 놓은 병아리들에게 모이를 주며 분을 새기고 있었다.“미국무성의 지속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굿펠로를 시켜 무기를 사들이는 대통령의 깊은 고뇌를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프란체스카, 앞의 책)

이승만은 ’전쟁목표를 천명‘한 외교각서를 써서 장면 총리에게 주고 워싱턴 공관에서 활용하도록 편지를 써서 외교행랑 편으로 급히 보냈다. “우리의 입장이 그들의 입장이고 우리의 전쟁이 그들의 전쟁이기 때문에 정당한 상식을 가진 국제연합의 모든 회원국가들은 우리가 목표를 삼아 싸우고 있는 원칙을 탄탄하게 지켜나갈 것으로 확신합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체 하면서 사실은 자유세계의 적을 지자하는 국가들로부터 회원국들이 영향을 받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동시에 ’국민에게 보내는 특별담화‘도 발표하였다.“우리의 힘을 다해 우리 자신의 전비(戰費)를 부담해야 떳떳한 국민이 된다. 남의 도움으로 우리 국민과 민권을 보호할 수는 결코 없으므로 세금을 완납함으로써 이 전쟁에 승리하고, 하루 빨리 통일을 완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한다”이승만 대통령에 호응하는 청년단체와 시민단체들은 자발적으로 대규모 국민집회를 열고 “38선 돌파” “무기를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마다 같은 구호를 쓴 포스터를 붙이고 플래카드를 걸어 전국 분위기는 ’자주통일‘ 열기에 달아오른다. 이것이 늘 그래왔듯이 이승만식 국민통합 정치이며 국제외교의 기본바탕을 만들어 ’국민외교‘를 펼치는 전술이었다.

◆ 트루먼, ‘휴전’ 위해 맥아더를 전격 해임하다

맥아더가 하루밤새 해임되었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깜짝 놀랐다.트루먼 대통령은 4월11일 밤 1시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불러, 맥아더 사령관의 해임을 발표한다. 해임 이유는 “맥아더가 대통령 지시를 심각하게 위반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트루먼은 ’대통령의 명령 불복종‘ 이유로 맥아더의 4개 직위: 연합군사령관, 유엔군 사령관, 극동군사령관, 태평양미군사령관직을 한꺼번에 박탈했다. 원수(元帥)계급은 종신직이라 박탈할 수 없었다. 맥아더가 ’불복종한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트루먼은 지난해 1950년12월5일 영국수상 애틀리와의 회담에서 약속한 것, 즉 “정부 관리들은 대외정책에 관련된 문제를 담은 성명을 발표할 경우 국무성과의 합의를 거쳐야한다”고 지시한 바 있었다. 이것은 애틀리 수상이 미국의 원폭사용, 바로 맥아더의 원폭투하를 예방하기 위해 “영국의 사전 동의를 받으라”고 트루먼에게 다짐받은 그 것을 트루먼이 응하여 지시한 것이었다. 맥아더가 이 지시를 위반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표면적인 명분일 뿐, 트루먼이 맥아더를 사실상 ‘파면’ 시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맥아더의 ‘승리 작전’과 트루먼의 ‘휴전 작전’의 대결

“전쟁의 승리냐?” “현상유지 휴전이냐?”한반도 통일 직전에 우려하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맥아더와 트루먼의 갈등은 표면화되었다. 처음부터 맥아더는 한국 통일만이 아니라 중국 탈환까지 염두에 둔 전략을 구사한다. 트루먼 민주당정권이 국공합작을 벌이다가 마오쩌둥 공산당에게 빼앗겨버린 중국대륙을 이참에 회복하지 않으면 한국전쟁도 승산이 없을 뿐더러 아시아에서 땅에 떨어진 미국의 신뢰를 회복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맥아더는 진작부터 대만 장제스 군대를 참전시키고 중국본토 진격작전을 도모하자고 제안하였다. 트루먼은 아니다. 처음 참전 결정때 ‘38선 원상회복’이 목표였는데 이승만과 맥아더의 ‘북진’작전에 휘말려 38선돌파도 양보하며 질질 끌려가는 형국인지라 대통령 체면이 말이 아니다.더구나 영국의 휴전압력에 응하며 맥아더를 견제하려 하지만 사상최고의 국민영웅 ‘독불장군’ 맹수를 어쩌랴. 여론도 정치위기도 두려운 트루먼은 기회를 엿보며 증거물을 챙긴다.

전쟁대통령과 전쟁사령관의 정면 대결! 맥아더가 제시한 ‘종국적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싸우느냐 마느냐! 더 이상 전쟁하기 싫은 대통령과 끝까지 전쟁하려는 사령관,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전쟁은 결국 ‘백악관의 권력’이 전장의 장수 목을 자르는 것으로 결판난다.

▶트루먼, 맥아더 ‘파면 증거’ 수집◀트루먼은 3월부터 맥아더의 성명문과 편지 등을 놓고 ‘파면’을 검토해왔다.하나는 맥아더가 한국전선을 시찰한 뒤 3월23일 발표한 성명서인데 내용은 이러하다. “중공군은 우리 공군과 해군에 의해 보급선을 철저히 징벌당하여 패퇴를 거듭하고 있다. 38선은 이제 의미가 없다. 우리 공군과 해군은 38선을 얼마든지 넘나들고 있으며 지상군도 과거 벌써 넘었던 선이므로 밀고 올라가고 있다. 만일 적군이 휴전교섭을 해온다면 전쟁사령관으로서 그 권한 내에서 적절히 대응하겠다” (정일화 [휴전회담과 이승만] 선한약속, 2014). 트루먼의 휴전 움직임을 알고 있는 맥아더가 보란 듯이 쐐기를 박는 공개발언이다.

또 다른 문건은 하원 공화당 대표(원내총무) 조셉 마틴(Joseph Martin)이 4월5일 백악관에서 공개한 맥아더의 편지였다. 내용인 즉, 마틴 의원이 2월12일 뉴욕에서 트루먼의 유럽중심주의를 비난하며 한국전쟁을 이기려면 대만군대를 사용하라고 주장한 연설문을 맥아더에게 보내 의견을 물었을 때, 맥아더가 다음과 같이 화답한 사연이었다. “...대만의 장제스 군대를 활용하자는 생각은 내가 지금까지 추구하던 방향이니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외교관들은 혀로 싸우지만 우리는 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국가들에 맞서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유럽도 연달아 무너질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유럽 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 바로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의원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전쟁에는 승리를 대신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트루먼은 책상을 쾅쾅 두드리며 화를 냈다. “이런 매국노가 있나...더 이상 놔둘 수 없어!”이 편지내용은 국가안보국이 도쿄 공군기지에서 도청한 내용, 즉 스페인 등 외교관들이 맥아더가 중국과의 전쟁을 불사한다고 본국에 보고하는 발언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트루먼은 “누가 봐도 명령불복종의 확증이 될 수 있어....고집불퉁 장군을 불러들일 마지막 기회”라고 일기에 써놓았다. (핼버스탬, 앞의 책)

◉트루먼의 라이벌 제거=트루먼은 4월5일부터 이 문건들을 가지고 5일간이나 날마다 관계자들을 불러 “맥아더를 어찌해야 할지 결정하라”고 다그친다. 애치슨 국무장관, 마셜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 페이스 육군장관 등이 그들이다. 4월8일 합동회의에서 소련대사를 오래 지낸 대통령 고문 해리만(Averell Harriman)이 “맥아더는 2년 전부터 불복종했으므로 해임했어야 했다”고 편을 들었다. 맥아더가 껄끄러웠던 각료들과 군부수뇌들도 모두 동의를 표했다. 기다렸다는 듯 트루먼은 즉각 브래들리에게 ‘해임’ 준비절차를 지시하였고, 마침내 맥아더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11일 한밤중에 서둘러 핵폭탄을 터트려 버렸던 것이다.트루먼은 그때 사적인 자리에서 맥아더를 더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총독, 즉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는 거야. 자기가 일개 육군 장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관은 바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잘못이지.”(핼버스탬, 앞의 책)

트루먼이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불복종’이지만, 내면을 보면 사연은 얼키고 설킨다.특히 다음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맥아더는 유력한 대선후보로 부상하여 트루먼을 위협하는 존재였으며, 게다가 그동안 3차대전 위험을 들어 ‘북진’을 제지할 때마다 일방적으로 맥아더에게 끌려 다녀야 했던 신경전에서 대통령이 쌓였던 열등감을 폭발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워싱턴 정가의 관측이 그랬다. 미국 동부 엘리트 육사출신 최고의 전쟁영웅과, 중부 시골 고등학교 출신 대통령의 대결에서 “역시 백악관 권력의 승리”로 결판 난 것이라는 논평들이 나왔다. 그리고 민주당 대통령이 공화당의 ‘정치적 라이벌’을 가차 없이 제거해버린 것으로서 이 해임은 다음해 선거에서 트루먼이 아니라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당선에 큰 도움이 된다.

◉맥아더의 대응= 겉으로 담담한 척 했지만 속으로 격분한 맥아더, 그날 도쿄를 방문한 미국 상원의원 맥너슨(Warren Magnuson) 일행과 점심식사를 막 끝내려던 참에 부인(Jeanie MacArthur)이 건네주는 전화를 받자 말문이 막혔다. 백악관 발표가 라디오 방송으로 나왔다는 폭탄 뉴스, 육군장관 편에 미리 전하려 했으나 부재중인지라 맥아더의 부관으로 하여금 맥아더 부인에게 전화로 통보하였다는 말이었다. 맥아더에겐 왜 전화도 못했을까?잠시 듣고 있던 맥아더가 입을 열었다. “지니, 이제 드디어 우리가 집에 가게 되었구려!”맥아더 부부는 필리핀 관리를 맡은 이후로 미국 본가에 못가본지 14년이나 지나고 있었다. 젊은 날 육사에서부터 오랜 군지휘관 생활을 통해 세련된 ‘감정통제의 달인’ 맥아더는 그러나 그 후 미의회청문회와 자신의 회고록에서 본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트루먼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예측불능의 인간”이라고 써놓았다. 얼마든지 사전에 통보하고 논의할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전세계 앞에서 망신을 주려 한 짓이라고 토로했다. ([맥아더 회고록], 앞의 책)

◉미공화당, 트루먼 공격=뜻 밖에 나온 트루먼의 전격적 인사조치를 보자 미공화당이 폭발했다. 전국위원회를 긴급 소집한 공화당은 “민주당 트루먼 정부가 소련과 중공에 지나친 유화정책으로 대응하며 한국전쟁을 방관”한다면서 “중국 대륙에 이어 한국까지 공산세력에 내주면 세계평화와 미국 안보에 극심한 위험을 자초할 것”이라 주장하고 “즉시 만주를 폭격하라”고 요구하였다. 맥아더를 경질할 것이 아니라 중공군의 배후를 끊어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맥아더의 전략을 따르라고 촉구한 것이었다. ([조선일보] 1951년 4월15일자)

◉미국민 여론 분노=맥아더의 해임에 분노한 미국민들이 들끓었다. “트루먼을 탄핵하라” 전국 곳곳에서 트루먼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웠고, 일부 노조는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4월16일 맥아더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50여만 인파가 환영하고 도심까지 행진하였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70만 시민이 종이 꽃가루를 뿌리며 ‘영웅’을 환호한다. 유럽 2차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귀국 때보다 곱절쯤 많은 인파였다. 당시 여론조사는 국민 66%가 맥아더 해임에 ‘반대’한다고 발표했다. 주간지 [타임]지는 “인기가 많은 사람이 그보다 훨씬 인기가 없는 사람에 의해 파면당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며 “트루먼은 전형적인 소인배”라고 보도했다. 공화당의 유력자 리처드 닉슨(뒷날 대통령)은 “즉시 맥아더를 복귀시키라”고 주장했다.(핼버스탬, 앞의 책). 모스크바와 베이징에서는 기쁨과 환희의 종이 울리고 축제 기분에 휩싸였다고 맥아더는 회고록에 썼다. “소련 공산당 두목 스탈린과 중공 마오 등 적군의 소원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대신 충족시켜주었다“는 말은 맥아더와 공화당의 혹평만이 아니었다.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인류 전쟁사의 철칙을 무너트렸으니 미국은 스스로 패배할 것이라고 규탄하는 사람들은 ”겁쟁이 트루먼이 중국대륙을 공산당에 내주더니 한국까지 팔아먹는다“고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승만 “맥아더에 감사” 편지...‘1인전쟁 체제’ 돌입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맥아더에게 편지를 보낸다. ‘청천벽력’같은 뉴스였지만 이승만은 놀라지 않았다. 독립운동시절부터 이 보다 놀라운 충격을 수없이 겪어낸 76세 백전노장이다.리지웨이 장군이 작년 말 워커 후임으로 왔을 때 이승만은 예감이 왔다. 맥아더와 다른 미국 충성분자 리지웨이, 맥아더를 견제하려는 인사라고 프란체스카에게 말했던 그 예측이 들어맞은 것이다. 떨리는 심장을 달래며 맥아더에게 무한한 감사의 말들을 타이핑친다.

“귀하가 사령관직에서 물러난다는 전혀 예측불능의 뉴스를 접하고 우리는 큰 충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본인은 이 시점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귀하가 한국 방어를 캘리포니아가 공격 받은 것처럼 우리를 방어하겠다고 나에게 여러번 말한 바처럼 우리가 공격받았을 때 귀하는 그렇게 했다. 이 일은 한국 애국시민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본인은 귀하가 한국문제 해결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으며 한국의 통일된 독립을 위해 얼마나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국민은 귀하가 대한민국을 위해 행한 모든 일ㅇ를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준 확고하고 지속적인 우정도 영원히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경애하는 장군! 본인은 우리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은 귀하의 계획에 따라 해결될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명예로운 결과는 다른 어느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귀하의 이름은 이 시대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그리고 정치가(an outstanding leader and statesman)로서 세계 역사에 빛을 더해 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맥아더 회고록] 앞의 책)

맥아더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승만의 편지를 수록해놓았다. 그만큼 그들은 ‘평행 동지’였음을 말해준다. 이승만이 외롭게 싸우던 1932년 6월 맥아더는 피츠버그대학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한국이 죽음의 고함을 지를 때 누가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 주는가”고 외치는 연설을 했음은 앞에서 본바와 같다. 특히 공산주의를 인류의 적-역사의 악(惡)으로 규정한 역사관과 정치이념의 동반자, 6.25전쟁에서 공산 침략을 물리치며 남북통일을 위해 함께 싸워 운 ‘반공의 전우’임에랴. 한국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맥아더에게 감사’를 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승만 “일방적 휴전땐 죽음을 각오 결사반대” 처음 표명

맥아더가 사라진 통일전쟁, 이제 이승만 ‘1인 전쟁’이 되었다. 이승만은 즉각 전쟁각의를 소집한다. 참석자는 장면 총리, 신성모 국방, 임병직 외무, 조병옥 내무 장관이다. 유엔군의 38선돌파지연 문제를 논의하려던 회의는 맥아더 해임 대책까지 할 일이 많아졌다. 각료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청취한 이승만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해임함으로써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 갔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트루먼 그 사람은 이 전쟁을 적당히 끝내려 합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유엔군의 원조를 받고 있으나 우리 국토, 우리 민족을 갈라놓게 되는 그 어떤 조치도 나는 수용할 수 없으며, 이 전쟁을 적당히 그만두려 한다면, 승리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 반대할 것입니다.” ([정일권 회고록] 앞의 책)

맥아더의 만주폭격과 원자탄 사용 약속을 의지하였던 이승만은 이제 믿었던 동반자를 잃었다.어떻게 할 것인가. 리지웨이가 맥아더를 대신할 미국 장군이 될 것인가. 아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맥아더의 후임 유엔사령관이 되어 도쿄로 떠나고, 그 빈자리에 제임즈 밴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1892~1992)장군이 8군사령관이 되어 한국에 왔다.

◆맥아더 청문회...“공산주의와 싸우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

맥아더 청문회는 5월3일부터 열려 42일간 진행된다. 공화당이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까지 탄핵해야 한다며 요구한 상원 군사위원회와 외교위원회 합동청문회는 6월 말에야 끝난다. 이 보다 앞서 귀국직후 4월19일 상하양원회의에서 맥아더는 유명한 고별연설을 한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는 말로 끝내는 연설에서 맥아더는 국가철학, 반공정진, 아시아 중심주의와 세계평화론 및 6.25전쟁에 대한 전략전술 소신과 한국민에 대한 찬사를 빼놓지 않았다.

“...나는 증원부대를 요청했으나 보낼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압록강 북쪽 적의 보급 기지를 파괴하도록 허가하지 않는다면 대만의 약 60만 명 병력을 한국전에 투입하자고 했다. 그것이 곤란하면 중국 해안을 봉쇄하여 외부로부터 원조를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문제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 사령관으로서의 나의 견해임을 밝혔다. 결과는 나의 입장을 왜곡하고 나를 전쟁 도발자라고 비난했다. 이는 진실과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한국의 비극은 군사행동이 제한되어 있어 더욱 비참해지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 중 사력을 다해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한국민의 용기와 확고부동한 신념은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전한 최후의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제 52년 군인 생활을 마치려 한다. 내가 입대한 것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내가 웨스트포인트 광장에서 선서를 마친 이래 세계에는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나의 희망과 꿈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나는 초년 장교시절 군대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이 노래의 노병처럼 이제 군대 생활을 끝내고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여 온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간다.”

▶맥아더가 직접 참석한 청문회는 사흘간이었다. 이때 맥아더는 서슴없이 트루먼의 감정적 인사 조치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한다. “명령 불복종은 군인으로서 가장 중대한 범죄다. 그 불명예스러운 비난을 받는 군인은 예외 없이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고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법에도 설명과 청문을 요구할 권리가 규정되어 있다. 나에게는 전혀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하등의 법적 호소를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떠나고 나도 일개 시민이 되었을 때 회고록을 통해 나의 해임사유가 명령 불복종에 의한 것이라고 뒤늦게 말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이다. 맥아더는 ‘트루먼 씨’라 부르며 직격탄을 날린다. ‘문관우위’는 미국 정치의 기본 요소지만 자신처럼 갑작스런 방법으로 해임된 예는 없다고 했다. “나는 지휘권 이양에 따른 예의를 지키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사무실의 사환, 청소부, 하급직원도 이처럼 해고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썼다. ([맥아더 회고록] 앞의 책)

트루먼은 맥아더의 청문회를 크나큰 승리의 순간으로 기록했다. 오랜 숙적의 발톱을 뽑아버린 것으로 여겼다.(핼버스탬, 앞의 책)그러나 트루먼 민주당 정권은 다음해 1952년 대선에서 참패한다. 맥아더 해임후 중공과 휴전 협상을 시작했던 트루먼은 ’종전(終戰)‘을 공약한 아이젠하워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193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집권한 이래 20년 만에 정권이 공화당으로 넘어간 것이다.

중국 내전에 간섭하여 ’국공합작‘하라며 자유우파 장제스 장군의 발목을 붙잡아 맴으로써 중국대륙을 빼앗겼던 트루먼 정권, 한반도 통일 눈앞에서 맥아더의 ’북진‘을 막고 중공군의 천적 맥아더를 해임하며 ’휴전카드‘를 가로질러,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결정적으로 차단해 놓고서야 물러나고 말았다. 한국의 입장에서 도대체 무슨 심술인가? 그는 왜 한국전에 참전하였으며 왜 한국 통일을 원천봉쇄하였던가. 왜 한반도를 동강내고 중공을 살려내어 끝없는 위기상황을 조성, 이토록 전 세계가 몸살을 앓게 만들었는가. 우리에게 트루먼은 ’참전의 은인‘보다 측정할 수 없는 분단고통의 족쇄를 채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승만 진두지휘...“화천발전소를 확보하라...‘파로호 대첩’!

리지웨이의 ‘킬러 작전’(Operation Killer)은 글자그대로 잔인한 중공군을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갔다. 38선을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공방에서 이승만의 관심은 고려 왕도 개성(開城) 장악과 남한 에너지의 공급원 화천(華川)수력발전소 확보였다.이승만 대통령의 전력 에너지에 대한 집념은 유명하다. 흔히 휴전후 1956년 미국의 ‘원자력협정’ 가입으로 원자력 발전의 선구자였음은 잘 알려져 있으나, 그보다 훨씬 이전 1948년 ‘5.14 단전(斷電)‘때부터였음은 아무도 모른다. ’5.14 단전‘은 북한이 남한에 제공하던 전기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사건이다. 바로 김구가 4월에 평양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5월 초에 돌아와서 ”김일성 장군이 남한 송전(送電)을 걱정 말라고 약속했다“고 장담한지 열흘도 안되어 김일성이 전면 단전, 전국이 암흑천지로 변했다.미군정 당국에 부탁하여 발전선(發電船)을 들여오고 서울 당인리 발전소 확장 등을 강구할 때 6.25침략전쟁이 터졌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을 때 38선이북 화천발전소는 탈환즉시 1호발전기를 복구, 11월 시운전하던 중 중공군에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1951년 2월 이승만은 부산에서 리지웨이 8군사령관에게 ”화천발전소만은 꼭 확보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맥아더가 해임되고 8군사령관은 밴플리트 장군으로 바뀌며 전선은 교착상태, 이번엔 밴플리트에게 요청을 거듭한다.”부족한 식량은 빌려 오든가 사먹어도 되지만 전기만은 그럴 수 없으니 화천발전소만은 반드시 우리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밴플리트 장군만이 아니다. 국군 정일권 총장과 백선엽 장군 등 지휘관들에게도 신신 당부하였다. ([정일권 회고록] 앞의 책.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6.25사변과 한국전쟁] 앞의 책 등)

▶용문산 전투-파로호 대첩◀”서울을 반드시 재탈환하라“ 마오가 명령한 중공군의 5차공세로 용문산 전투가 벌어졌다. 1951년 5월 국군 제6사단과 유엔군이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과 가평군 화악산 일대에서 중공군 3개 사단과 치열한 공방을 벌여 격퇴한 뒤, 도주하는 인해전술 적군을 춘천 지암리에서 격파, 패잔병을 휘몰아 화천발전소 화천호(華川湖:화천저수지, 현 파로호)까지 쫓아가 남김없이 섬멸하여 ’현대판 살수대첩’이란 칭송이 붙은 전쟁이 그것이다.미군은 6사단(사단장 장도영) 장병들을 보면 ‘겁쟁이 블루스타’(Coward Blue Stars)라며 조롱하였다. 왜냐하면 ‘푸른 별’ 마크를 단 6사단이 중공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사창리(史倉里) 전투에서 중공군의 진격보다 더 빨리 도망쳤기 때문이다. 얼마나 허겁지겁 도주했는지 105mm 곡사포를 몽땅 버리고 와서 이번에 재편성시 18문을 새로 지급받아야 할 정도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지시까지 받은 6사단은 달라졌다. ‘결사’(決死) 두 글자를 머리띠와 철모에 붙이고 그 치욕을 말끔히 설욕한 것이 파로호 대승이다. 이승만에게 다짐한 밴플리트 장군은 유엔군 제3차 반격작전에 나섰다.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5월 20일 화천 탈환을 목표로 좌로부터 미 제2사단, 7사단과 24사단, 국군 제2사단과 6사단으로 병진공격을 개시, 대관령에서 국군1군단이, 한계령에서 미육군 2사단이 몰아붙이자 중공군은 역부족이다. 연합군은 날마다 수만 발씩 포탄지원 속에 전진 또 전진, 지암리(芝岩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26일 가평∼화천간 삼각형 우리 속에 중공군을 몰아넣었다. 중공군은 갈팡질팡, 총도 없는 노무자에게 1개분대가 두 손을 들거나, 한국군 군복만 보면 스스로 무장해제, 전투를 포기한 대대 병력이 줄지어 백기를 들어 주저앉았다. 6사단은 최대 의 전과 2,600여명 포로를 잡고, 다른 부대도 몰려드는 포로를 감당 못할 지경이었다. 미17연대가 28일 화천을 점령하고 국군6사단 주력이 화천저수지 남쪽에서 구만리발전소∼병풍산 일대를 총진군하자 중공군 대부대는 외통수에 빠졌다. 도주로는 화천저수지 뿐, 줄줄이 익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사망자만 2만4천여명, 푸른 호수는 핏빛으로 물들고 시체들로 뒤덮여 출렁거린다. 수심이 깊고 동서 21km, 남북 1km 화천호는 주민들의 식수원, 부패한 시체들을 군에서 제거한 한참 뒤에야 식수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승만 ‘파로호’ 작명 기념비...친중정권때 ‘개명’ 소동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 이름을 ‘파로호’(破虜湖)로 작명한 휘호를 직접 써서 선물한다. 중공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이름, 군에선 유사이래의 천적 중공군을 ’물로 이긴 호수 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휘호를 새긴 기념비를 호반에 우뚝 세웠다. 일찍이 고구려군이 당나라 대군을 무찌른 ’청천강 살수대첩‘에 비견하며 민족자존감을 키우자고 해마다 다짐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대첩기념식을 올리던 파로호의 이름을 바꾸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70년 지난 날벼락, 2019년 문재인 정권시대 화천군수가 ’대붕호‘(大鵬湖)로 개명하자고 했다. “중국 관광객이 싫어한다”는 이유, 이 말은 중국 측이 만들어준 핑계, 정부지시를 숨기자는 꼼수였다. 당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혼밥‘을 여러 번이나 했다는 친중정권, 호수 개명쯤이야 일도 아니다.첫 보도는 한겨레신문(2019년 3월 6일자)이다. 3·1운동 100돌과 남북 평화시대를 맞아 ‘파로호’ 이름을 옛이름 ‘대붕호’로 바꾸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는 것, 알고 보니 중국 시진핑 정부가 패전 흔적을 지우기 위해 한국정부 측에 개명을 강요한 사실이 밝혀졌다. 최문순 화천군수도“신화통신 등 중국 언론인도 이런 요구를 한 적이 있다”고 언론에 실토했고, 당시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도 주중대사 시절 중국 측으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다고 전해졌다.그러자 화천문화원 등 시민단체들이 나서 “지키자, 파로호!”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호수를 맴도는 시위까지 벌였다. ‘대붕호’는 1944년 일본이 화천발전소를 건설하며 ‘대명호’(大䳟湖)로 장난친 이름, 중공의 압력에 굴복하여 “일제잔재를 부활시키지 말라”며 저항한다. 결과는 개명저지 성공, 다행히도 ‘파로호’는 오늘도 좌파세력의 친중주의를 경고하는 승전비로남아서 ‘중국 침략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키는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계속>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4/05/14/2024051400307.html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