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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조맹덕이 손도 안 대고 코 푼 비결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강 건너 불구경하다가 하북의 4개州 차지

 

곽가(郭嘉‧생몰연도 서기 170~207)는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 휘하에서 복무한 참모다. 상고(上古) 한어(漢語) 발음으로는 ‘콱 크라이(kwak kraj)’라고 한다고 한다.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 위서(魏書) 정곽동유장유전(程郭董劉蒋劉傳) 등에 의하면 곽가는 평범한 무리와는 크게 달랐다. 그는 당대에 잘 나가던 하북(河北)의 강자 원소(袁紹)와 면접 보고서 합격 직전까지 갔음에도 출근을 거부했다.

 

대신 조조의 또 다른 참모 순욱(荀彧)의 추천으로 조조와 만나 면접 봤다. 곽가와 몇 마디 말 섞어본 조조는 “내 대업(大業)을 이뤄줄 자는 이 사람밖에 없다”며 한참 어린 새파란 곽가를 극찬했다. 곽가도 “비로소 진정한 주군(主君)을 만났다”며 매우 기뻐했다. 곽가는 오늘날로 치면 시가총액 수십~수백조원의 대기업을 마다하고 이제 막 살림이 필까 말까 하는 중견기업에 취업한 셈이었다.

 

곽가는 치밀한 정보수집과 정확한 안목으로 조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조조는 수십만 정병(精兵)을 거느린 최대 위협 원소를 치려했으나 내심 두려워했다. 조조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대책을 묻자 곽가는 망설임 없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원소에게는 열 가지 패인(敗因)이 있고 주공께는 열 가지 승리요소가 있으니 병력 차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첫째, 원소는 형식적으로 (인재들에게) 예의를 차리지만 조조는 진심이다. 둘째, 원소는 천자(天子)를 거스르나 조조는 (황제를 모시고서) 그 황명(皇命)을 따르니 천하가 복종한다. 셋째, 원소는 쓸데없는 데 인정을 베푸나 조조는 엄격하다. 넷째, 원소는 (인재들을) 시기‧질투하나 조조는 재능을 중시한다. 다섯째, 원소는 계획만 그럴싸하고 실천력은 없으나 조조는 책략을 세우면 반드시 행한다.

 

여섯째, 원소는 겉멋 치장에만 몰두하나 조조는 내실을 중시한다. 일곱째, 원소는 거시적 안목이 없으나 조조는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본다. 여덟째, 원소의 참모‧장수들은 제멋대로 놀며 권력만 다투나 조조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아홉째, 원소는 사리분별을 못하나 조조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다. 열째, 원소는 허세와 머릿수에만 의존하나 조조는 소수정예와 용병(用兵)을 중시한다”

 

언뜻 보면 입에 발린 아첨 같았다. 허나 원소 측의 내분‧자멸 등이 요점인 곽가의 전망은 머잖아 적중했다.

 

원소‧조조가 격돌한 200년 2~10월의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원소는 ‘선빵’에도 불구하고 처참히 무너졌다. 조조군이 거점을 선점한 걸 본 원소의 책사 전풍(田豊)은 “지구전을 하면서 조조의 근거지를 교란한다면 3년 내에 승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조조는 원소에 비해 군량이 턱도 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원소는 “저 따위 환관의 자식놈 조조쯤은 한주먹감인데 감히 나를 뭘로 보고 망발을 지껄이느냐” 노해 전풍을 ‘투옥’했다.

 

원소가 보낸 하북의 명장 안량(顔良)은 창칼의 수풀 사이로 뛰어 들어온 관우(關羽)의 일격에 목숨 잃었다. 또 다른 원소의 명장 문추(文醜)도 형편없는 졸전 끝에 조조의 장수 서황(徐晃)에게 목을 내줬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원소는 머릿수로 조조를 밀어붙여 어느 정도 가시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원소의 이랬다저랬다 변덕에 질린 참모 허유(許攸)와 대장 장합(張郃)‧고람(高覽) 등이 조조에게 투항함에 따라 완벽히 무너졌다.

 

조조의 막사로 찾아간 허유는 맨 발로 달려 나온 조조에게 원소의 군량고 위치 등 기밀을 모조리 불었다. 조조는 직접 경기(輕騎) 수천을 이끌고 오소(烏巣)를 기습해 산처럼 쌓인 원소의 군량‧마초(馬草)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장합‧고람은 “조조 본진은 텅 비었으리라” 아무 근거 없이 지레짐작한 원소의 명으로 억지로 출병(出兵)했다가 대패했다. “이 지경이 된 건 다 네놈들 때문이다. 처형하라”는 원소의 억지에 말문이 막힌 둘은 조조에게 항복한 뒤 원소에게 칼을 겨눴다.

 

사방에서 창칼이 정신없이 날아들자 원소는 단 수백 명의 기병만 수습한 채 저 혼자 달아났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쫄쫄 굶게 된 상황에서 총대장 생사(生死)마저 알 수 없게 된 원소군은 대혼란에 빠져 패주했다. “쟤네들 끼리 싸우다 알아서 무너질 것”이라는 곽가의 예상이 기막히게 적중한 순간이었다.

 

충격패한 원소는 202년 분사(憤死)했으나 조조는 쉽사리 북진(北進)하지 못했다. 원소의 세 아들인 원담(袁譚)‧원희(袁熙)‧원상(袁尙)과 외조카 고간(高幹)은 건재했으며 관도대전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하북의 대군도 재집결한 상태였다. 원담은 청주자사(靑州刺史), 원희는 유주자사(幽州刺史), 원상은 기주자사(冀州刺史), 고간은 병주자사(幷州刺史)로서 각자 임지를 지키면서 서로를 유기적으로 지원했다.

 

설상가상 오환(烏桓) 등 사나운 이민족들도 원가(袁家)를 도왔다. 따라서 형국은 여전히 백중지세(伯仲之勢)였다. 실제로 조조는 애송이들을 얕보고서 203년 하북을 침공했다가 일심단결한 원가 형제들 반격 앞에 초죽음이 된 바 있었다.

 

곽가는 이 때 또다시 원가 측 내홍‧자멸을 예측했다. 관도대전 때는 원소의 선공(先攻)으로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웠으나 이번에는 아예 격안관화(隔岸觀火‧적이 분열됐을 때 건드리면 단합하니 강 건너 불구경하다가 어부지리를 취함)하라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는 고민하는 조조에게 “우리가 급히 들이치면 (후계자를 다투는) 원담‧원상은 반드시 순치지세(脣齒之勢)를 이룰 것입니다. 우리가 남쪽의 형주(荊州)로 향하는 척하면 원담‧원상은 반드시 다툴 것입니다” 단언했다.

 

이번에도 곽가는 미래를 정확히 내다봤다. 조조가 짐짓 남쪽으로 내려가자 긴장을 푼 원담‧원상은 서로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원상은 일껏 자신을 도우러 온 맏형 원담에게 병장기‧군량 등 일체 지원을 거부했다. 원희는 막내동생 원상을 지지했으며 고간은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원상을 공격했다가 패해 평원국(平原郡) 하나로 봉토(封土)가 쪼그라든 원담은 ‘아버지의 원수’ 조조에게 덜커덕 항복했다. 춤을 춘 조조는 아예 자신의 아들 조정(曹整)과 원담의 딸을 혼인시켜 혈연(血緣)관계를 맺어버렸다. 그리고는 “나는 하북을 빼앗으러 가는 게 아니다. 내 사돈이자 옛 붕우(朋友‧원소)의 장남인 원담을 도와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어긴 저 천하의 패륜아 원상을 벌하러 가는 것이다. 원상을 돕는 자는 곧 천륜(天倫)을 어기는 검은머리 짐승이다” 명분 외치며 무서운 기세로 북진했다.

 

외견상 조조의 지원을 받은 원가의 장남이 진군(進軍)하는 모양새니 상당수 하북 인사들은 저항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당시 시대상 아버지의 지위를 장남이 물려받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원상은 연패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기주의 주도(州都) 업성(鄴城)까지 함락되자 원희에게로 달아났다.

 

이용가치가 사라진 원담은 그간의 ‘통수 시도’를 빌미 삼은 조조에 의해 주살됐다. 앞서 원담은 완전히 조조의 사람이 된 옛 부하장수 여광(呂曠)‧여상(呂翔)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장군인(將軍印)을 파서 보낸 바 있었다. 조조는 이를 알면서도 “저 개X끼는 아직까지는 우리의 개X끼다” 묵인해왔다.

 

원상‧원희도 머잖아 각개격파(各個擊破)됐다. 부하장수 초촉(焦触)‧장남(張南)의 배신에 쥐구멍까지 몰린 형제는 오환의 왕 답돈(蹋頓)에게 의지했다. 유주의 변경을 노략질하면서 조조 신경을 살살 긁던 셋은 조조의 한차례 공격에 박살났으며 답돈은 관짝에 들어갔다. 형제는 재차 요동(遼東)의 군벌 공손강(公孫康)에게 빌붙었다. “우리가 이곳을 먹자”는 되도 않는 욕심 부리던 둘은 방석이 채 깔리기도 전에 목만 철가방에 담겨 조조에게 배달됐다. 홀로 남은 고간도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주천(呼廚泉)의 ‘손절’ 앞에 명줄이 떡락했다.

 

곽가의 말대로 강 건너 불구경하다가 손도 안 대고 코 푼 조조는 스스로 기주목(冀州牧)에 취임해 하북의 주인이 됐다. 견씨(甄氏)라는 절세가인(絕世佳人)이 조비(曹丕)에게 재가(再嫁)함에 따라 조조는 생각지 않게 며느리도 얻게 됐다. 견씨는 원희의 아내였다. 그녀가 조비에게 시집갈 때 원희는 멀리 요동에서 거지꼴로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시점이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제3지대에서의 파열음이 크다. 민주당 현역의원 평가하위 20% 대상이라고 통보 받은 4선의 김영주 국회부의장은 ‘사당화(私黨化)’를 성토하며 민주당 탈당을 전격 선언했다. 이낙연 개혁신당 공동대표도 총선 지휘봉을 오로지하게 된 이준석 공동대표에게 크게 반발 중이다. 국회부의장‧대선주자라는 중량급들이 목소리 높이는 등 국민의힘은 손도 안 댔는데 알아서 자가분열하는 모양새다.

 

원래 사람은 조급할수록 “환상의 조선제일검.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식의 공 세우기, 바빠 보이기에 집착하게 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내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불 난 집들을 들쑤실지, 아니면 침착하고 인내심 있게 곽가의 격안관화 전략을 답습할지 주목된다. 다가올 국민의힘 현역의원 컷오프(공천배제) 앞 반발에 한 위원장이 어떠한 리더십을 발휘할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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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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