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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짱꿰 박멸’ 김만술의 기적 발현되길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 담은 담론

‘높은 산봉우리’ ‘협박 경청’ 오염된 서울‧인천

4‧10대첩 대진표 윤곽… 각 고지들 탈환되길

 

사지(死地)에서 무쌍(無雙)을 발휘한 용사는 많다. 그러나 약 ‘45배’나 많은 적군을 물리친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거의 힘들다. 아니, 사실 불가능하다. 그런데 해낸 인물이 있다. 이 기적 같은 승리, 범 같은 만인적(萬人敵)의 주인공은 6‧25의 영웅 고(故) 김만술(金萬述‧생몰연도 1929 또는 1931~1991) 육군 대위다.

 

교육부 산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엔평화기념관, 다수 언론보도 등에 의하면 고인은 경남 함안 출생이다. 1947년 6월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국군 전신)에 입대해 특무상사로 육군 중화기 중대에 복무했다.

 

고인은 김일성의 남침(南侵)으로 6‧25가 발발하자 축석령‧다부동 전투, 동평양 비행장 공격 등 수많은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인정받았다. 결국 1953년 7월 소위로 현지 임관(任官)해 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에 임명됐다.

 

소대장 부임 당일인 7월15일 고인은 얼굴도 미처 채 익히지 못한 35명의 소대원과 함께 경기 연천 북부 베티(Betty)고지에 투입됐다. 당시 휴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얻기 위한 고지쟁탈전이 모든 전선(戰線)에서 치열했다. 1사단 전초기지인 베티고지도 휴전선이 임진강 남쪽으로 밀리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 최대 전략요충지 중 하나였다.

 

앞서 약 보름 동안 이곳을 지킨 7중대 1소대는 미친 듯한 중공군(中共軍) 인해전술(人海戰術) 앞에 빈사(瀕死)상태에 빠진 터였다. 지휘봉을 받아든 고인은 소대원들과 함께 철통같은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15일 오후 7시께부터 마침내 중공군은 천지를 울리는 꽹과리소리‧함성과 함께 노도(怒濤)처럼 밀고 들어왔다. 그 규모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습격 때보다도 훨씬 많은 ‘2개 대대’ 수준이었다.

 

당시 고지를 덮친 중공군의 정확한 병력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6‧25 당시 편제(編制)상 중공군 1개 대대는 800명 안팎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토대로 하면 고인과 소대원 35명을 공격한 중공군 총 병력은 약 ‘1600명’이 된다. 산술적으로 도저히 승리를 바랄 수 없는 전력차였다. 게다가 중공군 베테랑들은 1927~1950년 국공내전(國共內戰) 때부터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한 살인귀들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벌어졌다. 결과부터 얘기하면 약 13시간 동안 수차례 격돌하면서 전개된 치열한 총격전‧백병전(白兵戰)에서 중공군은 ‘전사 314명, 부상 450명’이라는 궤멸적 타격을 입고 격퇴됐다. 우리 측 피해는 ‘전사 24명’이었다고 한다.

 

교전 과정은 처절했다. 오후 7시께 중공군은 각종 화력지원 하에 우리 측 포화를 뚫고서 고지 교통호까지 들어왔다. 인명경시(人命軽視)가 일상인 중공군은 앞 선 전우를 인간방패 삼아 돌격했다. 우리 소대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으나 최초 난입한 중공군을 고인이 직접 총검으로 격살(擊殺)하자 용기백배해 응전(應戰)했다.

 

패주한 중공군은 오후 10시께 고지를 포위하듯 부대를 산개(散開)한 뒤 재차 공격해왔다. 우리 병사들은 미군 등의 지원포격 및 총격으로 저지하려 했으나 일부 중공군이 재차 교통호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수류탄 투척에 의해 소대 무전기는 파괴됐다. 중공군은 우리 측 총검‧수류탄 반격에 재차 격퇴됐으나 외부와의 통신망이 끊긴 소대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처지가 됐다.

 

그러나 지휘력을 발휘한 고인은 연락병을 자정께 중대본부로 보내 전황(戰況)을 보고하는 한편 통신망 복구를 요청했다. 대대장이 즉각 통신병 4명을 파견함에 따라 16일 오전 2시30분께 통신은 재개됐다. 그것도 모르던 중공군 일부가 오전 4시께 다시금 몰려왔으나 일심동체(一心同體)로 싸운 고인과 소대원들 용맹 앞에 몰살됐다.

 

인해전술은 괜히 인해전술이 아니었다. 번번이 패했음에도 오전 5시40분께 또다시 일군(一群)의 중공군들이 알이라도 깐 듯 바퀴벌레처럼 기어왔다. 고인은 수적 한계를 깨닫고 생존 소대원들을 전원 동굴 속으로 대피시켰다. 벌레들은 “진내(陣內)사격하라”는 고인의 요청에 따라 한미(韓美) 후방포격 앞에 박멸됐다.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즉 진내사격은 ‘적군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와 아군이 전멸 직전이다. 아군에게 오폭(誤爆)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군을 격멸하라’는 뜻이다.

 

고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중공군은 절반 가까이 머릿수가 줄어든 소대에게 최후의 일격(一擊)을 가하고자 안개가 낀 틈을 타 오전 6시께 재차 공격해왔다. 이 마지막 교전은 무려 약 1시간 반 동안 전개됐다. 자유대한(自由大韓)의 강산(江山)을 단 한 뼘도 공산 측에 내줄 수 없었던 고인과 소대원들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임에도 초인적 정신력으로 맞서 싸웠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본 중공군은 “우리가 높은 산봉우린 줄 알았더니 낮은 산봉우리였네” 백기 들고서 오전 7시30분께 완전히 물러났다.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무공(武功)을 세운 고인과 소대원들은 한미 모두에게 큰 감명을 안겼다. 고지를 끝내 사수한 고인은 1954년 우리나라로부터 국군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太極武功勳章)을, 미국으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수여받았다. 고인은 “비겁한 자는 평생에 여러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오직 한 번만 죽는다”는 말씀을 남겼다.

 

휴전 후에도 고인의 전투는 계속됐다. 그는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켜냈음에도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던 상이용사(傷痍勇士)들 재활‧복지를 위해 애썼다. 1960년 대위로 예편한 고인은 경기 시흥에 상이군경(軍警)용사촌을 건립하고 대한상이군경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고인 자신도 양구지구 전투에서의 척추부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전상병(戰傷兵)이었다. 1991년 상처가 재발돼 향년(享年) 60세로 타계(他界)한 고인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4‧10총선 대진표가 속속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서울 광진을의 경우 오신환 전 국민의힘 의원, 그리고 문재인정부 출신으로서 친명(親明)으로 갈아탄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대결이 확정됐다. 인천 계양을에선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격돌 가능성이 높다.

 

그간 수도권은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우리는 낮은 산봉우리”라 주장하거나 “중국 반대편에 베팅하면 후회한다”는 주한(駐韓) 중국대사 협박을 공손히 경청한 ‘토착 짱꿰(掌櫃‧장궤)’들이 설쳐왔다. 그리고는 무슨 기본OO이니 하면서 사실상의 묻지마식 사회주의 이념을 시민들에게 주입해왔다. 6‧25 때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키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신 어르신들이 보신다면 실로 통탄(痛歎)을 금치 못할 일이다.

 

이제는 ‘토착 짱꿰’로부터 이 나라, 특히 인구의 절반가량이 거주하는 수도권을 구할 때다. 고 김만술 육군 대위의 기적이 반드시 재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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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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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이 없습니다.
  • 오주한
    작성자
    2024.02.16

    방금 국가보훈부 영상자료를 보니 베티고지에 투입된 중공군은 800명가량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엄청난 병력차인 건 여전합니다.

  • 풀소유

    특히 고민정은 심판 받아야.

  • 켈켈켈

    계란볶음밥 마렵노

  • 오주한
    작성자
    2024.02.18

    본 개담에서의 속된 표현은 특정 인종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특히 자유대만과 대륙 및 전세계 곳곳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사랑 열망하시는 분들은 절대 아닙니다. 그 분들은 정말로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