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3국이 북한 비핵화를 놓고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 비핵화'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용어를 혼용하면서 북한이 한미 확장억제 무력화,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파기까지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주고 있다.
◆한미일 외교차관, '상호모순' 공동성명 발표 … '한반도 비핵화'와 '핵 확장억제' 재확인?
지난달 31일(미국 현지시간) 김홍균 외교부 1차관과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 오카노 마사타카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 등 한미일 3국 외교차관은 공동성명을 통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재확인하며, 북한이 전제 조건 없는 실질적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 공동성명에 "캠벨 부장관은 한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안보 약속은 철통 같으며, 핵을 포함한 모든 범위의 역량에 지원받을 것"이라고 명시된 사실을 미뤄 볼 때, 확장억제 제공국인 미국조차 '한반도 비핵화'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핵 확장억제는 상호 모순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비핵화'라고 쓰고 '북한의 비핵화'라고 읽는 美?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몰이해는 2018년 '미북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채택한 이 성명에는 '북한 비핵화'가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으로 두루뭉술 담겼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 김정은이 재확인했다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그의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약속"은 북한이 2016년 5월 발표한 ▲한국 내 미군기지의 핵무기 공개 ▲한국 내 모든 핵기지 철폐 및 검증 ▲미국 '핵 타격 수단'의 한반도 전개 금지 보장 ▲북한에 대한 핵 위협 중단 및 핵 불사용 확약 ▲주한미군 철수 선포 등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의 5대 조건'이었을 뿐이다.
미북간 성명에 '한반도 비핵화'가 명시된 것을 두고 당시 외교가에서는 "'한반도의 비핵화'라고 쓰고 '북한의 비핵화'라고 읽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미국과 북한의 동상이몽 속에 2019년 '하노이 노딜'은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北 위주 '9.19 공동성명' 이후 '한반도 비핵화' 용어 확산"일각에서는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 결과로 채택된 '9.19 공동성명'과 이후 정부 공식문서에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가 상용돼 왔으므로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북한 경수로협상 대표, 외교부 북핵외교기획단장·6자회담 차석대표·북핵담당대사 등을 역임한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의 저서 '북핵 30년의 허상과 진실, 한반도 핵게임의 종말'에서 지적했듯이, 9.19 공동성명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모호한 표현과 더불어 북한 핵 문제를 마치 남북한 공통의 핵 문제인 양 포장하려는 북한의 기본전략을 여과없이 투영했다.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 등 6자가 합의를 타결하려다 보니 공동성명에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가 담기게 됐다고 한다. 사안별로 이견이 워낙 많아 문서화된 합의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이 맹렬한 기세로 미국을 압박해 합의문을 도출했다.
이 이사장은 "한국 정부(노무현 정부)의 노력은 당시 북한을 압박해 조속한 핵 포기를 종용하기보단 미국을 압박해 중국과 북한의 입장을 수용토록 하는 데 주로 초점이 맞춰졌다"며 "따라서 6자 회담 과정에서 미일 양국과 남북중러 4국의 입장이 대립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고 회고했다.
한국 정부가 합의 타결을 위해 6자회담의 목적인 '북한 비핵화'가 아닌, 북한·중국·러시아가 주장하는 '한반도 비핵화'로 타협했다는 것이다. 이후 북한 핵 문제에 관한 국제사회의 대다수 합의문과 결의문에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은 자취를 감췄고, 대신 '한반도 비핵화'라는 애매하고 중립적인 표현으로 변경됐다.
◆北, '한반도 비핵화'를 '美 확장억제 무력화' 수단으로 활용북한은 북핵 협상의 본질인 '북한 비핵화'를 회피하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 확장억제를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미국이 주한미군에 배치했던 전술핵을 1991년에 철수했는데도 북한이 여전히 한미 연합훈련을 '핵전쟁 연습'이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 그 방증이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제1~2차 남북정상회담' 협상 과정에 참여했고, 6자회담 정부대표(당시 국가정보원 북핵전략처장)로 협상에 나섰던 '대북통' 유성옥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이사장은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애당초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 자체가 굉장히 문제가 많았다"며 "우리는 일찌감치 핵 보유를 포기했고 주한미군의 전술핵까지 철수했으므로 비핵화할 요소가 없었다"고 꼬집었다.
국정원 심리전단장 출신이기도 한 유 이사장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계속 쓰면 미국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항공기와 함선 등의 한반도 전개(통과·착륙·방문 등)가 불가능해진다"며 "북한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무력화하고자 앞으로도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계속 쓰며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외교부 "한반도 비핵화=북한 비핵화" … 국제혼란 초래
외교부는 지난 5일 "'한반도 비핵화'는 한미 워싱턴선언(2023년 4월), 한미일 외교장관 공동성명(2023년 7월),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 등에 두루 활용된 표현"이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한미일의 공통된 목표로서,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변함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시 말해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 비핵화'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출범 초기에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를 혼용하던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은 문재인 정부 당시 외교부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정부는 주한미군의 전술핵이 철수된 후 한국에 핵무기가 없으므로 '한반도 비핵화는 곧 북한 비핵화'라는 궤변을 펼쳤다. 정의용 당시 외교부 장관은 2021년 5월 2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핵우산 문제는 한미동맹 차원의 문제"라며 "'한반도 비핵화'하고는 상관없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타협의 산물인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면 북한·중국·러시아에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결과 국제사회에도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올해 3월 러시아는 거부권을 행사해 대북제재를 감시하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활동을 종료시킨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보다 약 1년 앞선 지난해 3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의 신시대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관계 심화에 관한 공동성명'에서 "제재와 압박은 바람직하지도 실현 가능하지도 않다"며 "북핵 문제의 해법은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반도 비핵화'→'북한 비핵화' … 한미일, 정확한 용어로 통일해야"
유 이사장은 "6자 회담 당사국이던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북한은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2006년 10월 9일 제1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됐다"며 "북한·중국·러시아의 입장에 끌려 다니지 말고 북핵 문제에 있어 우리가 중심이 돼야 한다. 워싱턴선언에 명시된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지만, 앞으로 최소한 한미일 3국 만큼은 '한반도 비핵화'가 아닌 '북한 비핵화'라는 정확한 용어를 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의 국방부와 통일부는 '북한 비핵화'라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통일부 통일미래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정훈 연세대 국제대학원 원장은 통화에서 "'북한 비핵화'라고 용어를 변경해야 한다"며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용어는 북한의 불법적인 핵무장 사실을 희석할 뿐 아니라 주한미군 철수와 핵공유 등 방위 태세 확립을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핵옵션을 대폭 축소한다. 현재 북한의 핵능력은 9.19 공동성명을 체결했던 2005년 당시에 비해 현저하게 증강됐다. 북한은 핵개발을 계속하고 있는데 우리만 골대를 지키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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