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이승만 대통령하면 주요업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만 떠올리지만 아래 두가지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글 써봅니다.
- 광복(독립)에 결정적인 역할
일부 학계에서는 이승만이 미국 여론을 바꿔놓는 외교·홍보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결과 카이로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발표가 나왔다는 분석 (물론 김구선생의 역할도 있었겠지만 당시 연합국 승전의 주축이 미국이였으므로 미국파 인맥을 통한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활동할 때도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
이런 노력이 없었으면 카이로 선언에서 우리나라는 빠지고 그냥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끔찍한 생각
참고
https://www.yna.co.kr/view/AKR20131122008700079
- 민주주의 선택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민주주의를 선택
전 세계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대립한 냉전시대에서 막 광복한 나라에 민주주의를 선택하여 정부를 만들었다는 것
지금의 우리에게 민주주의 공산주의 고르라면 쉽겠지만 당시 세계사를 보면 미국 본토에서 조차 공산주의가 팽배하던 시절이라 더 대단
실제로 처음에는 북쪽에서도 주석으로 추대되었으나 거절하고 계속해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하여 나라를 만들려고 했으나 해방후 1년이 지나고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좌익이 신탁통치를 찬성하자 결별을 선언
이승만이 신탁통치를 찬성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한 참고 (위키 발췌)
1945년 12월 30일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점에 있어서 의견이 전부 일치하였었다.[152] 그런데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 등 좌익진영은 3상회의 직후인 1946년 1월 2일 기점으로 신탁통치 찬성(찬탁)으로 일제히 돌변했다.[153][154][155] 이로써 좌익과 우익의 분열이 노골화하였다.[156] 좌익의 찬탁표명에 대해서는 모스크바와 평양으로부터의 지령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157] 민족진영은 외세를 적이라고 보았고, 공산진영은 동족을 포함한 지주·자본가를 적이라고 보았다.[158]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정례기자단회견에서 신탁통치 찬성으로 급선회한 공산주의자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결별을 선언하였다.[159]
덧붙여서
우리나라의 광복과 독립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임시정부와 그 투쟁사까지만 나오고 종전 이후 내용은 무슨 회담 무슨 회담 이런 내용만 배우는데 우리가 빠진 강대국들의 회담이 진행되는 중에도 이승만 등 많은 분들은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계속 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역사 전문가분들을 통해 제대로 정리되어 교과서에 실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칼럼으론 좀 모자란 갈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공식 태극기 (1948 ~1949) - 건곤감리 위치와 태극의 색이 지금과 다름
여기에 쓰면 묻히니까 칼럼에도 올려보세요
추천드림
축구보다 자게보다 그냥 짧게 쓰려던게 길어졌어요.
내용도 부실하고 틀린거 없나만 확인해서 그냥 (자러)갈넘으로 ㅎㅎ
빨갱이 학살도 업적임.
당시 미국도 난리, 영국은 진즉 난리였습니다.
넷플릭스 피키블라인더스에도 나옵니다.
근데 진짜 이승만은 부정선거만 없었어도 국부로 칭송받았을텐데..
이것도 좀 쓸게 있긴 한데
짧게 말하자면 415부정선거는 이기붕이 이승만 당선을 위해 저지른 것이 아니고 이기붕이가 자기 부통령 되려고 저지른 것입니다
당시 대통령 즉, 이승만은 부정선거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당선될 정도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시절 역사는 공부를 안해서 잘 몰라서요 나중에 글 한번 써주시면 잘 읽어볼게유
이승만 대통령이 시위의 진실을 알고 직접 병문안 하시면서 불의에 맞서는것은 대단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학생들 손 꼭 잡아주셨대요. 그리고 직접 하야성명 발표하시고.
런승만,김구 암살 사건 등 안좋은면도 충분히 존재하다보니.. 아쉬운 인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