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태종
일상에서 소식이 없는 사람을 말할 때 함흥차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함흥차사는 조선 후기의 야담을 모아놓은 <축수편>에 처음 실린 말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불편한 관계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함흥차사의 배경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화가 난 이성계가 함흥에 머물던 때로 올라간다.
이성계는 아버지인 자신의 뜻을 어기고 형제를 죽여 왕이 된 이방원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방원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너무도 싫었던 이성계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함흥으로 내려갔다.
이성계가 함흥으로 내려간 사건은 이방원에게는 큰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태상왕인 이성계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세상에 비치면 자칫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방원은 어떡하든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오도록 차사(중요한 일을 위해 파견하는 임시직)를 보내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차사들은 모두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해 돌아오지 못했다.
이방원의 고심이 커지자 이성계와 많은 전장을 함께 누볐던 박순(?~1402년)이 자처해 함흥으로 갔다. 박순은 이성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두 마리의 말을 별궁 양 끝에 떨어뜨려 묶었다.
이성계와 술을 마시며 옛일을 이야기하는 도중에 어미와 떨어진 망아지가 슬프게 울자, 박순은 무릎을 꿇고 "짐승도 부모를 이처럼 그리워하는듯, 태종도 매일 그리워 울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돌아가시지요."라며 이성계를 설득했다.
이 말에 크게 노한 이성계가 박순을 죽이려 칼을 뽑는 순간, 서까래에서 새끼쥐를 입에 문 어미 쥐가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크게 다쳐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의 어미 쥐가 새끼를 구하려 움직이자, 이성계의 마음도 어지러워졌다.
자식을 생각하는 미물의 모습에 심란해진 이성계는 차마 박순을 죽일 수 없어 그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많은 가신이 이성계를 농락한 박순의 죄를 물으며 그를 꼭 죽여야 한다고 읍소했다.
박순만큼은 죽이고 싶지 않던 이성계는 시간을 끌다 결국 가신들에게"그가 용흥강을 건넜으면 더는 쫓지 말라"고 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망치다 긴장이 풀려 병이 난 박순은 용흥강 강변에 있는 주막에서 하룻밤 더 머무르다 이성계의 가신에게 잡혀 죽고 말았다. 이것이 <축수편> 속 야담의 결말이다.
사실 실제 역사는 이와 좀 다르다. 이성계는 이방원이 보낸 처사를 죽이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박순과 송유만이 희생된 것으로 나온다. 또한 박순조차도 조사의의 반란 때 죽었다. 함흥차사 야담은 실제 역사와 다르지만, 이 이야기는 당시 백성들이 태조와 태종의 불편했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준다.
ㅊㅊ
ㅊㅊ
이성계와 이방원의 사이가 다소 불편했던 것은 사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좋다면 그것도 나름 이상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