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정종
조선시대에 들어 관료 선발의 가장 큰 변화는 무과 신설이었다. 이는 고려와는 달리 조선이 국방력 강화에 힘을 쓰는 동시에 문무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조선은 사병을 국가의 관료로 흡수해 혁파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1402년(태종2년)에 처음 시행된 무과는 3년마다 실시되는 정기시와 국가 행사나 국방력 강화 등 필요에 의해 실시되는 별시로 나누어졌다.
무과는 무예의 실력과 더불어 <손자>와 같은 병법서의 이해 정도를 묻는 시험으로 이루어졌다. 무예의 실력을 검증하는 것은 무술실력이 없는 양반들이 출세를 위해 무과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고, 병법서를 묻는 것은 무관들이 문관에 뒤처지지 않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이순신은 백전백승의 뛰어난 무관이면서도 <난중일기>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 길 수 있었다.
무과도 정기시인 식년시의 경우 문과와 같이 12간지 가운데 자 / 묘 / 오 / 유가 들어가는 해에 초시 / 복시 / 전시 3단계에 걸쳐 시행 되었다.
초시는 훈련원에서 주관하는 원시와 각 도별로 시행하는 향시가 있었다. 원시 70명과 향시 120명(경상도 30명, 충청 / 전라도 각 25명 , 강원 / 황해/ 평안 / 함경도 각 10명)으로 선발된 총 190명은 병조에서 실시하는 복시에서 28명으로 간추려졌다.
이들은 전시에서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등급이 매겨졌으며, 합격자에게는 합격 증서인 홍패가 주어졌다.
별시의 경우 식년시보다 자주 열렸으며 식년시 정원인 28명보다 더 많은 인원이 선발되었다.
양난 이후 무과 별시는 수시로 열렸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수백 수천 명의 합격자가 나오기도 했다. 1967년(숙중 2년)에는 무과에서 1만 8,251명이 선발되는 일도 있었고, 갈은 해에 여러 번 별시가 열리기도 했다. 그 결과 무과의 권위가 낮아져서 무과가 만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도 무과는 조선시대에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하지 못하는 서얼과 평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무과시험 시작 승과 폐지 무과도 식년시로 치뤄지지
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