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이준석, 범야권서 영원히 이방인일 뿐
선태후(宣太后) 미씨(芈氏‧생몰연도 ?~기원전 265)는 진시황(秦始皇)의 고조할머니가 되는 인물이다. 역사상 최초의 태후이자 병마용갱(兵馬俑坑)이 실은 진시황이 아닌 선태후의 것이 아니냐는 이설(異說)로도 유명하다.
젖먹이 아들 소양왕(昭壤王)을 대신해 수렴청정(垂簾聽政)에 나선 선태후는 고황후(高皇后)‧측천무후(則天武后) 등의 대선배 쯤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선태후는 기원전 306년 왕족(王族)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자식을 지키고 나라를 이끌었다. 다만 자신의 일족에게 권력을 나눠주고 그 전횡을 묵인하는 등의 어두운 이면도 있었다. 이들 네 명의 권신(權臣)은 사귀(四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전국책(戰國策)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미성년자에게 부적절한 내용일 수 있으므로 자제 또는 보호자의 지도를 부탁드린다.
기원전 307년 남방의 강국 초(楚)나라는 군사를 휘몰아 중원의 한(韓)나라를 들이쳤다. 강공 앞에 몰린 한나라는 근상(靳尙)이라는 자를 진나라에 보내 원병(援兵)을 요청했다. 진나라와 초나라는 라이벌 중의 라이벌이었다.
근상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를 들어 한나라를 속히 구해 달라 요구했다. 그런데 한나라를 도와줘도 별 이득이 없다 여긴 선태후는 다음과 같은 19금적인 논리를 들어 거절했다.
“내가 과거 선왕(先王)과 한 이불 덮었을 때 일이다. 선왕이 대퇴(大腿‧다리) 한 쪽을 내 몸 위에 올리니 무거워 죽는 줄 알았다. 반면 선왕이 온 몸으로 나를 누를 땐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 자세는 내게 매우 이로웠기(...) 때문이다. 막대한 대가 치르고 너희를 도와준들 우리에게 이로울 게 뭐 있겠나?!”
인용한 고사(?)가 다소 낯 뜨겁긴 했으나 의미인 즉슨 “온 몸, 즉 너희 강산을 전부 우리에게 바치면 출병(出兵)하는 걸 한 번 고려는 해보마”였다. 고명(高明)한 선비였던 근상은 선태후의 어머부끄한 일침 앞에 수줍게 달아오른 뺨 어루만지며 통곡했다.
그러나 상당수 백관(百官)들 생각은 달랐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초나라가 국력을 확장하면 그 다음 차례는 진나라가 될 게 뻔했다. 재상 감무(甘茂)는 그 자신이 초나라 출신이었음에도 소양왕에게 달려가 한나라 지원군 차출을 강력히 건의했다. 그 때 이미 18세의 나이로서 사리분별력이 있었고 사람 자체도 총명했던 소양왕은 한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물리쳤다.
금일(29일)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국민의힘 원내대표에 누가 선출되느냐에 따라 대여(對與) 원내 협력을 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22대 국회에서의 범야권 의석수는 대통령 탄핵소추 의결정족수(200석)에 근접한 190여석이다. 3석 확보에 성공한 개혁신당이 사실상 여당 운명을 결정할 양대 캐스팅보터 중 하나인 셈이다. 때문에 이 대표는 ‘온 몸, 즉 국민의힘 너희의 당권(黨權)을 다시 준다면 내 한 번 협력을 고려해 보마’ 식의 자세로 나오는 듯하다.
허나 이 대표는 보수우파 출신이다. 범야권에서 이 대표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개혁신당의 활약으로 여당이 무너질 시 범야권이 이 대표에게 헹가래를 선사할지, 토사구팽(兔死狗烹)을 선사할지는 자명(自明)하다. 이 대표가 국민의힘에 가진 서운함을 잘 안다. 그러나 오로지 감정만으로 대사(大事)를 치르는 자는 반드시 화를 면치 못한다. 이 대표의 냉철한 판단이 있을지 주목된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다음 대선 때 아마도 홍 시장님이 대선 후보가 된다면 연대 또는 합당이 가능 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이 대표께서 현명히 잘 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