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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정보]정치이념을 올바르게 이해해라- 한국 보수의 역사와 각 정치이념 탄생배경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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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홍 조교

https://theyouthdream.com/article/1117593

 

지난글에서는 진보의 정의와 거기서 파생된 정치이념의 역사를 알아보았다면

이번엔 보수의 정의와 한국 정치사상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왜 범위를 좁혔는지 의아할 수 있는데 

보수란 사회,문화,역사,종교등 각 나라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왕정국가라면 왕정주의를 공산주의에서는 공산주의체제 유지시키는 것을 보수로 여길 수 있음

보수란?

정치성향에서 현 체제에 대한 안정성을 우선시 하여 점진적인 개혁과 변화를 지향하는 정치이념

※.여기서 주의할것은 진보와 마찬가지로 우파=보수 가 아니라는것이다.

프랑스 혁명당시 

권위와 전통, 사유재산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파시즘으로 대표되는 급진주의자 = 우파

현대에서는 보수자유주의-바른미래당쪽 // 사회보수주의- 미국 공화당(홍준표님도 이쪽이라 추측됨)

 

이제 한국의 보수주의에 대해 쭉 설명을 하자면... 

 

1919년까지 한국은 복벽주의가 우세했엇다. 

복벽주의 = 사라진 왕조를 다시 부활 시키는것... 

 

하지만 하나의 통치자가 아니라 국민들 전체가 독립이란 공공선을 위해 다같이 일어나 3.1만세운동을 한 후

공화주의로 급격히 기울게 된다. 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공화주의 성격을 띄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민국이 바로 Republic을 중국식으로 번역한 한자어이다.

 

하지만 일본령 조선을 접수한 미국 연방정부와 소비에트 연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권에 대하여 승인을 거부한다.

그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국무의원들은 한국독립당을 제외하고 다 뿔뿔히 떠났고,

남북분단을 우려하여 통일 정부를 구성하자는 남북협상파의 리더 김구는 자신의 계파들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를 구성,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운영했지만 고령화에 내분(김구 암살)으로 결국 와해되고 만다..

김구는 이승만과 같이 우파 성향이였으며 대통령제를 주장했었다.

"대통령을 군주같이 앉혀놓고 수상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비민주제도일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전출한 이상 모든일을 잘하던지 못하던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일을 하여나가야 할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리에 맞지않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당시 의원내각제로 만들려했다가 이승만의원의 의견에 대한민국은 대통령제가 도입됨.

 

대통령제 

국민에 의해 선출되나, 중대한 법 위반으로 인한 탄핵이 일어나지 않는 한 국민으로부터의 신임을 잃어도 정부는 유지되는 형태

의원내각제 

행정부의 성립과 존속이 의회(입법부)의 신임에 근거하는 정부 형태

 

그리고....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처음으로 열린다.

본래 유엔의 결의로 남북 총선거가 예정되었으나 

소련의 거부로 북한 지역에서 선거를 열 수 없어, 남한만 투표를 하기로 했고

좌파세력인 남로당은 폭력을 통해 투표방해하기위해서

중도진영 중 근민당 등의 좌파와 홍명회의 민독당 등은 투표자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불참했고

우파인 이승만, 그리고 한민당만이 참여한 선거이다.

이러한 배경에도 투표율은 95%를 기록했고

 

한국사에서 최초로 자유 다당제를 정착시킨 사례이자 자유민주적으로 공직자를 선출한 사례이다.

 

Screenshot 2020-...

(당시 국회를 구성한 정당은 이렇게 다양했다.)

 

제헌 국회의원들은 

 

미국이 전파한 공화주의 , 민주주의 , 자본주의 이 세가지 이념에 민족주의 개념을 더하여

 

1948년 7월17일 제헌 헌법(1952년에 일부개정됨)을 제정하였고

 

1948년 7월 20일에 대통령 선거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clevervoice9) | Twitter

 

당선된 이승만 대통령과 부통령 이시영 그리고 제헌 국회는

 

 

이승만도 '대한민국 30년' 연호 써" "臨政, 환국 직전 '건국' 다짐" - 조선일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고 유엔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내에서 선출된 합법정부이자

대다수 한국인의 자유의사로 선출된 유일한 정부라고 결의한다.

 

이 결의로 조선이 분단되었지만, 소련과 북한은 대한민국 지역에 독재를 펼치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북쪽 지역을 장악한 뒤, 주체사상이라는 독재 위의 독재를 시작했고

남한의 민주공화국을 무너트리기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한다.

이에 남로당과 북한의 움직임을 경계한 한국의 지식인들은 정당 설립을 금지하거나 방해하는 독재 정당, 일국일당제 정당을 걸러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냉전적 반공주의는.. 과도한 매카시즘 광풍으로 변질되었고 한국에 제대로된 진보정당이 들어서는것을 방해했으며

제주 4.3 사건 , 보도연맹학살사건 여순사건등 각종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다.

 

허나 정치는 이렇게 미국식으로 했지만 상법 즉 시장주의에 있어서는 독일의 것을 참조하여

혼합경제체제를 만들기로 한다.

재산권은 보장된다고 하면서도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하며

그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경제상 자유도 사회정의의 실현과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이라는 한계 내에서 보장하는 방식..

즉 사기업을 부정한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헌법에 운수, 통신, 금융, 전기 등 주요 산업은 국유와 국영으로 관리

하도록 정해진 것. 공기업들도 이때 탄생하였다.

 

이는 지극히 사회주의스러웠기에 반발하는 의원도 있었으나 우린 국민사회주의 여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서

국민사회주의로 모두가 의견을 통일시킨다.. 

이 분들은 국민.. 즉 민족주의는 색깔이 없는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또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이 원한것도 사회주의였기도 했고.

~~~~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은 방대한 재산을 가진 기업을 효율적으로 경영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정부 재정수입에서 조세가 차지하는 비중..

즉 재정자립도가 20%밖에 안된 것이다. 

*오늘날 서울의 재정자립도는 80% 전국적으론 46%이다.

 

거기에 이승만은 공무원은 가난해야 일을 잘한다고 생각해서 턱없이 낮은 임금을 주었고

이는 곧 부정부패로 이어지게 된것이다.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승만은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보고 단순히 국제법이나 이상주의적인 시각으로는 국가를 지킬 수 없으니

온갖 정치적 공작을 통해 미국을 아군으로 만들어 대한민국을 지켜내기에 성공했다.

한국의 생존을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친미이지만 

미국의 뜻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친미는 결코 아니였던 이승만 대통령. 

중공군이 쳐들어왔을때 미국이 일본군을 보내려하자 일본군 보낼꺼면 공산군보다 한국군과 싸워야할꺼라고 으름장 놓기도했음

(친일x)

 

 

하지만... 외교는 좋았으나 혼합경제체제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바람에 여러가지 문제들이 터지고 만다.

대표적인것은 바로 공무원과 군인의 부패. 

이 부패가 가장 심각하게 나타났고 정권을 흔들게 된게 바로.... 

 

1950년 정부가 강제징집한 국민방위군 수만 명이 국회, 정부 및 군 고위층의 예산 횡령 및 뇌물 범죄로 인해 보급을 받지 못하여

그대로 희생된 군수비리 사건인 국민방위군 사건

1.4 후퇴당시 청장년 국민 총동원령을 내려 징집령을 내려놓고는

이들에게 지급될 수송비용과 식비 피복비등을 친이승만파인 신정동지회 국회의원 20여명이 사적으로 사용했고

징집된 방위군은 배고픔과 추위에 얼어죽고만다.

전쟁에 참여한것도 아닌데 조국인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 경시로 장병 수만명이 얼어죽고 80%는 폐인이 되어버린 이 사건...

 

이 사건으로 이시영 초대 부통령은 이승만 정부에 회의감을 느껴 신성모 장관과 함께 물러난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제 2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6.25에서 보여준 이승만의 행적들 (보도연맹 학살사건, 때문에 

반이승만파 공화구락부와 민주국민당이 손을 잡았고 민주국민당 김성수를 당선시킨다.

*이 공화구락부가 바로 민주당의 시초이다.

 

당시 가장 많이 뇌물을 받았던 신정동지회는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어서 

이미지 쇄신을 위해 공화구락부에게 손을 잡자고한다.

야권경쟁에서 밀린 공화구락부도 세력확장을 위해 이에 응했고 

 

자유당 당기

그렇게 대한민국 최초의 집권 여당인 원내 자유당이 만들어진다.

 

한편 미국은 6.25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대한민국에 원조를 베풀다가

뒤늦게 문제점을 발견한다.

그 당시 미국은 미국의 투자를 받고 싶다면 주요 산업과 기업을 국영으로 전환하라고 압력을 가한다.

 

그래서 흔히 사사오입이라 부르는 1954년 제2차 헌법 개정에서 혼합경제체제 였던 한국의 시장경제체제

자유기업체제로 바뀐것도 바로 이때부터이다.

주요 산업과 기업의 국유·국영 원칙은 폐기되거나 제한

사기업을 국·공영으로 이전할 수 있다는 조항 삭제

근로자가 기업 이익의 분배에 참가한다는 조항 1962년 폐지

정부 소유의 대기업은 4대 민간은행을 포함해 대부분 민간기업으로 바뀌었고

1950년대 주요 대기업의 거의 절반이 귀속업체를 전신으로 했다.

귀속재산의 취득은 상당한 특혜였으며, 그 불하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가 과감하게 자유기업주의로 전환했기때문에

 훗날고도성장의 주역으로 달리는 자유기업의 군단을 양성한 공적은 부정되지 않는다

 

 

1958년 자유기업체제로 인해 자본주의와 대기업이 발달하여 

세계 곳곳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이승만정부에서는 스위스의 사회민주주의개념을 가져오게 된다.

 

소유권절대의 원칙-> 소유권상대의 원칙

계약자유의 원칙 -> 계약공정의 원칙

 

하지만 이 당시엔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한국은

모두가 가난한지라 불평등은 커녕 평등에 가까운 사회였고

한국에 어울리지 않는 사권의 억압...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중요시한 부분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은 거대 국가권력 vs 취약한 개인의 희생 으로 경제체제가 만들어지게 된다.

**예를들자면 치매환자나 장애인돌보는 것을 사회적 책임이 아닌 각 가족들이 책임지는 상황같은것

 

다시 정치로 돌아가면...  

 

자유당은 장기집권하면서 점점 부정부패 변질되어 여러 폭정,부정선거등을 저질렀고

이에 사람들은 이에 4.19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부패한 정치인들.. 민간인의 죽음..국민들의 분노.. 결국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였고 

*잠시 머물려다 못돌아오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이 다시 귀국하는것을 막지 않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8258899#home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는 자유당 = 막장폭력단체 라는 인식이 박히게 되버린다.

 

그리고 이때의 막장행적때문에 대한민국 자유주의 정당들은 자신의 정당에 '자유'라는 글씨를 넣지 않거나 피하게 되었다.

자유한국당도 한국당이라 불리길 원하지 자한당이나 자유당으로 불리면 화를 냈던 것을 생각하면 됨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049484

 

한편 남아있는 자유당 소속인사들은 민주당계 정당이나 박정희대통령의 민주공화당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승만의 하야후 제4대 대통령선거가 치뤄지게 되는데.. 

 

민주당(1955년) 로고

사사오입을 반대한 야당세력들이 오늘날 더불어민주당의 뿌리인 민주당을 만들었고

 

윤보선 대통령을 당선시키면서 제2공화국시대를 열게 된다. 

 

 

 

 

미리 대충 말하자면

 

 

... 제2공화국에 나온것들 경제제일주의(공업화추진 국토건설사업추진) , 평화적 통일 , 과거사 청산 , 지방자치제도, 양원제, 사법부선출제

등 오늘날 삼권분립이 가능토록 한것들도 있는데

민주주의를 위한 당연한 진통을 버티기엔 국민들이 너무나 버티기 어려웠다는거 (기껏 뽑았더니 민주당내에서 서로 싸워요!)

 

ps.  지적에 따라 대폭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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