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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회피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라고 답글을 다셨더군요.

치킨

사교육비와 주거비문제로 결혼을회피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라고 답글을 다셨더군요.

솔직히 조금 삐졌습니다. 서른다섯살인 제 주변만 봐도 건실하게 살고 있는 친구들이 결혼을 안합니다. 결혼을 해도 아이가 없습니다. 있어도 하나만 낳습니다. 전 저와 친구들이 비겁해서 결혼과 출산이라는 삶의 한 단계를 이리저리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겁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솔직한 친구들입니다. 못하겠는 건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삐져버리는 것은 정말 비겁한 것이므로 퇴근버스안에서 변명을 한번 남겨봅니다.

 

"결혼 출산을 어떻게 해. 집도 없고. 애기 키우려면 둘 중 하나는 회사 그만둬야하고. 그러면 먹고 사는 건 어떻게 해. 애기는 누가 키워주니? 돈은 누가 벌어줘?"

이런 말이 나오면 나이 지긋하신 선배님들은 "나때는~" 부터 시작을 합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엔 정말로 맨몸으로 바다를 건너듯 삶을 살았다는 걸요. 그에 비하면 저희는 마치 "배를 사줘야 바다로 나갈거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연배가 높으신 분들이 보기엔, "우리의 삶은 소중하므로 폭풍에 던져진 조각배가 될 수 없다. 당신들은 그렇게 살았나? 어쩌라는건가. 당신들의 삶은 소중하지 않았나보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습니다. 헉 선배님들도 삐지시는건 아니겠죠? 하지만 젊은 우리의 말 속뜻은 저런 것이 아닙니다.

 

영감님과 저는 같은 시간에 살지만 같은 세계를 살지 않습니다. 

[난 그게 조금도 싫지 않았다. 걱정도 됐지만 전혀 딴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제 그림자 노릇은 지긋지긋했다. 엄마는 외아들을 잃었으니 앞으로 무슨 낙을 바랄 것이며, 올케 또한 과부가 되고 말았으니 죽지 못해 사는 게 가장 잘 어울리겠지만, 나에겐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엄마와 올케에 동조한 의무 기간은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내 안에서 삶의 의욕이 쾌적하게 기지개를 켜는 걸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아도 난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미치게 젊은 나이였다.] 박완서의 그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일부입니다.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김애란의 소설중에서 일부입니다.

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아, 이게 아니지. 박완서의 인물은 6.25를 뚫고 피란과 죽음의 위기, 주변인의 죽음, 북한군 점령지에서도 살아남습니다. 도둑질도 하고 미군피엑스에서 얼굴에 철판깔고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삶의 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김애란의 인물은 불안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면서도 실체를 알기 힘든 불안을 섬세한 방식으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폐허에서도 삶의 의욕이 기지개를 켰습니다. 그런데 21세기 고도로 성장한 사회에서 불안하다고요? 얼핏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김애란의 인물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삼십대 중반을 지나고 있지만 삶에서 이루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물려받은 것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직장생활을 한지 4년이 넘었고 평균보다는 덜 쓰고 많이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은행 잔고는 꽤 괜찮은 목돈이 모여있습니다. 하지만 목표로 했던 집값은 그것보다 더 많이 올라버렸습니다. 목표치를 재조정합니다. 어마어마한 사랑을 찾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런 특별한 매력은 없습니다. 유명인도 아니고, 부잣집에서 태어나지도 못했네요. 비트코인이나 갭투자 같은 것에 편승하지도 못했습니다. 보통사람은 대부분 그렇게 삽니다. 그리고 확신하건데 그 보통 사람들 다 불안해하고 있을겁니다. 그러니까 저런 글을 쓰는 김애란 작가가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것이겠죠.

아, 불안해 하지 않는 쉬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냥 포기하는 겁니다. '일반적' 이라고 생각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라고 생각했던 삶을 포기하면 됩니다. 만화에 나오는 짱구아빠처럼 회사에서 치여도 아내와 힘을 합쳐서 아들하나 딸하나 낳고 가족 바라보면서 살아내는 삶. 그걸 포기하면 됩니다.

 

애초에 질문이 결혼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면. 결혼은 내 가치를 증명하고 난 다음에 할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바다를 건너자고 말하려면 그래도 물 안새는 배를 마련해놓아야 말을 꺼낼 수가 있습니다.

삶의 가치에 인플레이션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박완서의 소설은 6.25.직후가 배경이고 소설 속에서는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기만 해도 운이 좋은 편입니다. 그 이후로 삶에는 필요한 것들이 계속 추가되어 왔습니다. 온가족이 단칸방에서 연탄불떼면서 살 때로부터. 아파트에 각자 방을 가지게 되고, 마이카 시대를 지나고, 개인 피씨 시대를 거치고, 요즘엔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이 필요합니다.

'배가 불렀네' 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평범한 삶을 위해 진짜 필요한 것이니까요. 사치품이 아니고 진짜 필수품이 되었으니까요. 그것들은 전부 필수품이고 하나라도 부족하면 곤란합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당장 학생들은 수업도 못 듣습니다.

 

그런 과정을 수없이 거쳐서 이젠 삶 자체가 사치품이 되었습니다. 부동산의 가격은 그것을 대표하는 지표중 가장 큰 것 하나입니다.

평범한 삶을 목표로 잡으려면 이제 상당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평범한 삶이라면. 연애 결혼, 자식을 얻고, 내집마련, 노후대비, 자식의 학자금을 대주는 것. 이 정도는 해야 평범한 삶입니다.

"내가 지닌 가치로 따지면 저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당당하게 결혼 같은 걸 목표로 할 수 있습니다. 내 가치를 증명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런데 전 아무것도 아니고요. 유명인도 아니고, 부잣집에서 태어나지도 못했고 비트코인이나 갭투자 같은 것에 편승하지도 못한 사람 대부분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았던 삶의 가치와 비용은 이태리제 명품만큼 올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이번 생에 그런 가치를 스스로 지니기엔 힘들어보입니다.

아니면 톱니바퀴 하나를 빼버리면 됩니다. 노후대비...를 빼긴 좀 그렇고요. 내집마련이 안되면 노후대비가 안되고요. 아무래도 자식을 얻는 것이나 연애결혼을 빼야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현 세태는 이 인플레이션을 오히려 부추깁니다. 그냥 둬도 가격이 오르는 부동산에 규제를 들이밀어서 부채질을 합니다. 페미니즘은 절 보고 남성이라는 이유로 기득권이라고 하고 나쁜사람이 아니란 걸 증명하랍니다. 난 나쁜짓을 한 적이 없는데?

 

제 시야에서 본 바로는 이렇습니다. 이건 누가 의도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필연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대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그런 것입니다. 정치도 이런 상황을 당장 해결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기에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해결된 척 모양만 내는 건 싫어하시니까요.

다만 저희에게 비겁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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