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대 최장수 대통령인 지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100세.
카터 전 대통령은 대통령 퇴임 후 적극적인 행보로 '평화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카터 센터는 이날 성명을 통해 "미국 39대 대통령이자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12월29일 일요일 15시45분께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자택에서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며 "그의 나이는 100세로, 미국 역사상 최장수 대통령이었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은 4명의 자녀와 11명의 손자, 14명의 증손자를 뒀다. 아내 로잘린 여사와 손자 1명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차남인 칩 카터는 "나의 아버지는 저뿐만 아니라 평화와 인권, 이타적인 사랑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웅이었다"며 "저희 형제와 자매는 아버지의 이러한 신념을 전세계 사람들과 함께 나눴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준 덕분에 전세계가 우리의 가족이며 우리는 이러한 공유된 신념을 계속 실천하면서 그를 기억해주는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카터 센터와 가족들은 구체적인 사망 원인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간의 암 투병 등이 원인으로 보인다.
그는 노년기에 여러 건강 문제를 겪었다. 2015년 8월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이 간과 뇌로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가 그해 말 완치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에도 합병증을 앓았으며 2019년에는 낙상으로 뇌 수술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2월에는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가정에서 호스피스 완화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지난해 11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동반자 로잘린 여사 장례식장에 모습을 나타냈으나, 건강 문제로 직접 발언하지는 않았다. 이후로도 주로 가족을 통해 입장을 전해왔다.
지난달 1일에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처음으로 100세 생일을 맞이했다. 올해 11월 대통령선거에서는 우편투표로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한 표를 행사했고, 최근에는 건강 문제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성명에서 "오늘 미국과 전세계는 특별한 지도자이자, 정치인, 인도주의자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이어 "이 나라의 모든 젊은이 그리고 목적과 의미가 있는 삶을 사는 게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하는 사람은 원칙과 신념, 겸손을 갖춘 남자인 지미 카터를 공부해야 한다. 그는 우리가 품위 있고, 명예로우며 용감하고 동정심이 많으며 겸손하고 강인한 좋은 국민이기 때문에 미국이 위대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장례식 추도사를 부탁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트럼프 당선인도 SNS를 통해 "지미가 대통령으로 직면했던 도전을 우리나라에 중요한 시기에 찾아왔고, 그는 미국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모두 그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고 추모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카터 전 대통령의 시민권 및 자연 보호, 중동 평화 노력, 파나마 운하의 파나마 반환 등의 업적을 거론하면서 "카터 전 대통령은 더 낫고 공정한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장례는 연방정부 차원의 국가장례(국장) 형식으로 치러진다. 애틀랜타와 워싱턴DC에서 공개 장례식이 먼저 열리고, 이후 자택이 있는 플레인스에서 비공개 장례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자세한 일정은 관계 기관이 발표할 예정이라고 카터 센터는 전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 10월1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입대했고, 1953년 전역했다. 이후에는 고향에서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 땅콩 농장을 운영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경쟁자가 부정선거로 낙마, 극적으로 의원직을 거머쥐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어 조지아주지사를 거쳐 1976년 대통령선거에서 단기간에 인지도를 높이며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고, 현직인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을 누르며 대통령이 됐다.
재임 기간 대표적 치적으로는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불리는 중동 평화협상 중재 성공이 꼽힌다.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 협정 체결을 주선했다.
이 역사적인 협정은 이듬해 3월 양국이 적대행위를 끝낸다는 조약 체결로 이어져 수십년간 지속한 중동 갈등을 막고 중동 평화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970년대 경기 침체에도 물가가 오르고 실업률이 올라가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잡지 못했다는 비판에 시달렸고, 인권을 앞세운 도덕주의 외교정책도 발목을 잡았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후 강경파 대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 대사관 직원 등 52명을 444일간 억류한 사건이 대표적 외교 실패 사례로 거론된다. 당시 특수부대를 투입한 구출 작전이 미국인 8명만 숨진 채 실패로 끝나면서 지지율은 추락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80년 대선에서 '위대한 미국' 건설을 내건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대패해 연임에 실패, 단임 대통령으로 그치게 됐다.
대통령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카터 전 대통령이 재평가를 받게 된 건 퇴임 후 행보 때문이다.
1982년 부인 로잘린 여사와 함께 비정부기구 '카터 센터'를 설립했고, 지구촌 분쟁 해결에 몰두했다. △해외 부정선거 감시 △분쟁 중재 △인권 보호 △보건복지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평화가 필요한 곳에는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오슬로 협정' 중재(1993년), 우간다·수단 분쟁 조정(1999년), 베네수엘라 대통령 소환투표 감시(2004년) 등이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이에 '세계 평화 전도사'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02년에는 국제 평화를 위해 전세계를 누빈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거머쥐었다. 이밖에도 유엔 인권상과 대통령 자유 훈장 등 수많은 인권 관련 상을 받았다.
한국과 인연도 깊다.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79년 한국을 찾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회담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한국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아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제시, "내정간섭을 중단하라"고 반발한 박정희 정권과 각을 세웠다.
그는 2018년 3월 펴낸 회고록 '지미 카터'에서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핵무장 등을 둘러싸고 박 전 대통령과 충돌한 1979년 6월 방한 당시 한미정상회담을 두고 "동맹국 지도자와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퇴임 후인 1994년 북핵 위기가 불거지자 직접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본명 김성주) 전 북한 주석을 만났다.
이후 2010년 8월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고메스를 석방하기 위해 두 번째로 방북했다. 이듬해에는 국제사회 원로 모임인 '디 엘더스' 소속 전직 국가수반 3명과 다시 북한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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