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바지에 손을 넣은 윤석열 대통령, 작심한 듯 빨간색 문서 파일을 들고 간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대통령실에서는 21일 윤-한 면담 후 '분위기가 좋았다'고 에둘러 전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은 정진석 비서실장을 한 대표 옆에 앉혀 배석이 아닌 '동급'으로 간주하게 만들었고, 여당 대표는 대통령 심기를 건들만한 내용이 담긴 파일을 면담 테이블에 가져와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결국, 20년간 검찰에서 '화양연가'를 보낸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감정의 골만 드러낸 채 빈손으로 헤어졌다. 면담 후 한 대표 대신 박정하 당대표 비서실장이 브리핑을 진행했고, 윤 대통령은 한 대표가 떠난 후 친윤(친윤석열)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용산으로 불러 저녁을 함께했다고 한다.
이번 면담을 지켜본 국민의힘 한 전직 의원은 필자에게 "윤-한 갈등을 풀려면 한 분은 검사동일체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 다른 한 분은 당정일체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생 검사로 살아온 두 사람이 시류에 떠밀려 정치권에 입문한 만큼, 검사 때를 확실히 벗어야 정치권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제언한 것이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과거 검찰 재직 시절 '검사동일체의 원칙'에서 살았다.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피라미드형의 계층적 조직체를 형성해 상하 복종 관계로 일체 불가분의 유기적 통일체로 활동하는 것을 뜻한다. 검사동일체의 원칙이 요즘 검찰 조직에선 많이 희석됐지만, 윤 대통령과 한 대표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매우 엄격했다.
두 사람이 검찰 내 최고의 특수통 검사로 불린 것도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충실히 수행한 결과라는 것이 전직 검사들의 전언이다. 그랬던 두 사람이 정권의 현재와 미래 권력으로 다시 만났으나 아직도 검사 때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대두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직시해야 한다. 어제 제로 콜라를 대접하며 만난 한동훈은 과거의 '조선제일검'이 아닌 선거를 거쳐 당선된 엄연한 집권당 대표다. 카운터파트너이자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이다. '형수'에게 칼을 겨눈 한 대표가 껄끄러울 수 있겠지만, 대통령은 통 큰 정치력을 행사해야 하는 자리다. 정무적으로 냉정히 사안을 바라보고 접근해야 '생존'할 수 있다.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가 일심동체가 될 수 없다면 '오월동주'(吳越同舟)라도 해야 한다.
역대 대통령 중에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여당 대표와 수시로 독대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2년 9월 껄끄러운 정치적 파트너인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100분간 독대했다. 진심으로 만났든 잘 연출된 정치적 퍼포먼스였든 제18대 대선의 물줄기를 바꾼 역사적 장면으로 꼽힌다. 친이(친이명박)계와 친박(친박근혜)계의 반목이 정점을 찍은 상황이었고, 이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20%대로 주저앉은 상태였다. 두 사람의 독대는 새누리당 내 전열을 가다듬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결국 '정권 재창출'로 이어졌다. 정무 감각이 뛰어난 두 정치인이 오늘날 윤-한 콤비에게 보여준 모범 사례다.
한 대표도 조선 중종의 심복이던 조광조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 조광조는 중종이 가장 아끼던 신하였으나 과도한 개혁 정책으로 왕과 반목하는 바람에 인연이 비극적으로 단절됐다. 검사 시절 승승장구한 한 대표는 공명심이 남다르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당정일체 없이는 한 대표가 추구하는 정치 개혁도, 정권 재창출도 어렵다는 점을 통각(統覺) 해야 한다. 과거 친박 대표주자였던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양측 모두 공멸의 뒤안길을 걸은 전철을 기억해야 한다.
여권 일각에선 윤 대통령과 면담 당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회담 가능성을 시사한 것 윤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하필 윤 대통령과 면담이 있는 당일 민주당 의원들은 김 여사를 국정감사장에 불러내겠다며 '동행명령장'을 들고 대통령실을 찾아갔다. 여야 대표회담 발표 시기를 조금 늦추는 '정무적 판단'이 아쉬운 대목이다.
윤석열 정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을 위해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한배를 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대통령실과 여당은 '이인삼각' (二人三脚)이 돼야 한다. 서로 앞서가겠다고 다퉈서도, 다른 방향으로 가려 해도 성공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 때 극단적인 당·청 분리, 앞서 언급한 박근혜 정부 때 당·청 갈등은 모두 공멸로 이어졌다.
정치권 한 원로 인사는 "윤-한 갈등에 회심의 미소를 지을 사람이 이재명 대표"라고 진단했다. 11월 사법리스크로 인한 위기설이 윤-한 갈등과 김건희·명태균 논란이 덮고 있다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앞선 문재인 정부는 집권 세력의 분열로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한은 과거의 통각(痛覺)을 잊지 말아야 정글과 같은 정치권에서 생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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