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1996년 북한에 피살된 고 최덕근 영사 순국 28주기를 맞은 지난 1일 국가정보원이 '최덕근 영사 홀대' 논란에 휩싸였다. 국정원 퇴직자들이 사전 신고 후 추념행사를 개최하려고 하자 현직 국정원 직원들이 '국정원 외부의 보국탑도 규정상 보안시설'이라며 막아섰기 때문이다. 국정원 퇴직자 모임인 '양지회'는 규정 개정의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내년부터 최덕근 영사 추념 행사를 양지회 차원에서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국정원 외부 보국탑 보안시설 규정' 논란 … "설립 취지에 안 맞아"
8일 뉴데일리 취재에 따르면, 국가정보연구회, 대한민국구국혼선양회, 최덕근영사를그리워하는사람들 소속 회원 10여 명은 지난 1일 오전 10시 '최덕근 영사 순국 28주기 추념 행사'를 개최하고자 30여 분 일찍 국정원 정문 옆 산자락에 있는 보국탑에 모였다.
국정원 퇴직자를 포함한 이들 시민 10여 명은 '10월 1일 오전 10시에 보국탑 앞에서 추념행사를 개최하겠다'며 국정원에 두 차례 사전신고를 했고, 승인까지 받았다. 그러나 국정원 보안요원들은 사전신고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국정원 외부의 보국탑도 규정상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는 보안구역'이라면서 행사 개최를 막으려 했다.
보국탑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 주차장을 지나 국정원 청사를 오른쪽으로 끼고 200m가량 올라가면 나오는 산자락에 있다. 퇴직자들은 보국탑의 경우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사진이 나올 뿐 아니라 보국탑의 설립 취지에 비춰봐도 국정원 본부와 같은 보안시설로 규정한 것은 현실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퇴직자들은 여러 차례의 통화를 거쳐 약 한 시간가량 실랑이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행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미 예정된 시작 시간을 약 30분 넘긴 시각이었다. 행사는 현수막 게첩이나 기념사진 촬영은 안 된다는 조건에서 보안요원들의 감시 속에서 격앙된 분위기로 진행됐다.◆"국정원 망가질 대로 망가져 … 앞으로 양지회가 상주 역할 할 것"
신언 국가정보연구회장은 추념사에서 "대한민국 국가정보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이제 회복이 불가능한 정도다. 특히 최덕근 영사 같은 분이 일신을 희생해서 쌓은 자랑스러운 국정원의 역사가 오늘날 정치권 세력에 의해 이렇게 허무하게 망가지는 순간을 맞이했다"며 "여기(보국탑) 같이 계시는 18분의 다른 영령들과 쌓아 놓은 이 기록이 더는 훼손되지 않고 국가안보를 위한 국가 정보기관의 역할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종한 양지회장은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나라를 지키려는 구국정신과 애국정신이 굉장히 부족하다. 그런 측면에서 이 행사는 우리로서는 앞으로 지켜나가고 키워 나가야 할 정신"이라며 "이 행사의 상주(喪主)는 양지회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양지회가 상주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린다"고 밝혔다.
◆"보국탑, 일반에 개방하고 추모식에 崔 영사 유가족 모셔야"장석광 '최덕근영사를그리워하는사람들' 대표는 "최 영사 추모 행사는 단순히 1996년 10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피살된 한 명의 정보요원을 추모하는 행사가 아니다"라며 "이 행사는 대한민국 70여 년 역사에서 국가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살다가 '이름 없는 별'로 남은 모든 정보요원을 기리는 행사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정보요원들을 기억하는 것은 여기 우리 살아남은 요원들의 임무고 국가의 책무"라고 말했다.
이어 "언젠가 기회가 되면 최 영사 유가족과 함께 추모행사를 진행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내곡동 보국탑을 민간인에게도 개방했으면 좋겠다"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최 영사가 순국한 블라디보스토크 현장에 조그마한 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 국정원이 이스라엘 모사드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덕근이 '한국의 엘리 코헨'이 되면 국정원은 저절로 모사드가 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지만 무혐의 판결을 받은 정규필 호림안보협의회장(예비역 국군정보사령부 대령)은 "홀로 보국탑에 내려앉아 대모산 자락 내려다보니 먹구름 사방에 드리우고 세작들이 득실거리는 소굴. 망망한 정보바다 파도에 참(眞) 정보요원 보이지 않네. 아, 장부의 심장 터지고 단지엔 피가 멈추질 않네"라는 '최덕근 영사님의 혼백이 이르기를'이라는 제목의 추모시를 지어 낭독했다.
◆'형식적 보안'에 매몰된 국정원 … "국정원 규정 개정해야"장 대표는 통화에서 "국가정보연구회 소속인 국정원 퇴직자들이 국정원 관련 부서에 사전신고를 했는데도 직원이 3명이나 나와서 이렇게 방해할 줄은 정말 몰랐다. 같이 온 일반 시민들 보기 부끄럽다"며 "국정원은 '보국탑은 보안시설이므로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면서도 전직 직원들이 좋은 뜻으로 여는 추모행사인 점을 고려해 승인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현장에 와보니 보안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행사 개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상부와 여러 차례 확인을 거친 뒤에 돌아온 답은 '행사를 개최하되 사진 촬영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국정원 대북공작국 소속 간부가 정보원 명단을 유출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등 국정원은 정작 지켜야 할 보안은 뒷전이고 형식적인 보안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 대표는 "국정원이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갈 데까지 갔다. 리모델링 수준이 아니라 해체 후 개편하는 수준으로 가야 할 정도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다"며 "청사가 아니라 보국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데 보안상 문제 될 것이 무엇이 있는가. 보국탑도 이미 인터넷에 검색하면 사진이 많이 나와 있는데, 국정원이 형식에 매몰돼 있다. 경비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규정에 따를 뿐이지만, 규정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퇴직자들은 윤석열 정부 들어 국정원이 바뀔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런 '홀대'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토로했다.
장 대표가 최 영사를 기리고자 2023년 추념행사 당시 보국탑에 헌화했는데 이틀 뒤 국정원에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감사를 표하기 위한 전화일 것으로 기대했으나 "꽃을 치우라"는 전화였다.
2022년 추념행사에는 권영해 제21대 국정원장(국가안전기획부장)을 비롯해 퇴직자 20명 이상이 참석할 것이라고 신고했지만 보국탑 내부 감실(龕室) 전구에 불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추념행사를 열기 30분 전에 국정원이 자체 추모행사를 열었는데 관심이 없었는지 확인조차 해보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정원 요원 2명이 지난달 네팔에서 산사태로 순직했다는 소식을 언급하며 "국정원이 이런 순직자들에 대한 추모를 또 일회성으로 반짝하고 끝낼 거로 생각하니 안타깝다"며 순직요원들에 대한 국정원의 홀대에 대한 안타까움을 거듭 토로했다.
▲고 최덕근 영사는 누구인가
1942년 경기 평택에서 출생한 최덕근 영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영사관 영사로 재직 중이던 1996년 10월 1일 귀가 도중 아파트 계단에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칼, 도끼, 독침 등으로 살해됐다.
당시 최 영사와 러시아에서 근무한 동료들에 따르면, 북한 공작원들은 엘리베이터를 고의로 고장 냄으로써 최 영사를 계단으로 유인해 후방에서 급습했다.
최 영사의 시신에서는 북한 공작원들이 살인용으로 사용하는 '네오스티그민'이라는 독극물이 검출됐다. 1996년 9월 '북한 강릉 잠수함 침투'가 발각돼 우리 군이 작전을 벌이자 최 영사를 살해함으로써 보복한 것이다.
또한, 당시 최 영사는 북한에 있어 '눈엣가시'였다고 한다. 그는 북한의 위조지폐인 '슈퍼노트'의 유통 경로를 추적하는가 하면, 귀순 의사를 밝히며 도움을 요청하는 러시아 내 북한 벌목공들의 귀순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최 영사는 국정원 순직요원들을 기리는 '이름 없는 별'의 첫 번째 별이자 유일하게 신상이 공개된 인물이다. 다른 이들은 신원을 공개할 수 없는 블랙요원이지만, 최 영사는 외교관으로서 '화이트 요원'에 해당한다. 현재 최 영사의 시신은 국립대전현충원 순직 공무원 묘역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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