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에 대한 대만 국민의 '애국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침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 TSMC 주식을 사는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글로벌 패권 경쟁이 군사력에서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자원과 공급망으로 옮겨가는 가운데 대만인들에게 TSMC 주식 매수는 단순한 투자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미국‧유럽‧아시아 등 전세계 국가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실리콘 방패'를 보호하자는 의지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등은 천문학적 자금을 동원해 자국산업 보호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자금 지원은커녕 관련 지원책 마련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러다 자칫 후진국으로 몰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까닭이다.
3일 블룸버그통신이 대만 증권거래소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TSMC 주식의 7월 단주매매(odd lot trading) 거래액은 지난달 26일 기준 618억 대만달러(약 2조5800억원)로, 월별 통계로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단주거래는 주로 수액 개인투자자들이 하는 1000주 미만의 거래를 의미한다.
대만 예탁결제공사 등에 따르면 1000주 미만을 보유한 TSMC의 소액투자자 수는 같은 날 기준 97만6400명으로, 1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2020년 10월까지만 하더라도 소액투자자 수는 19만명 선이었다. 2022년 10월 90만명을 넘어서면서 정점을 찍었다. 3월 60만명대까지 떨어졌다가 최근 다시 급상승하고 있다.
무엇보다 TSMC 지분 가운데 1000주 미만을 소유한 개인투자자 비율은 1%도 채 안 되지만, 외국 투자자들이 줄어든 가운데 올해 소액주주 숫자는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부 소액투자자들은 TSMC를 지원하기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받거나 심지어 결혼 준비자금을 빼내 주식을 사고 있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IT 엔지니어인 제임스 펑은 블룸버그에 "TSMC가 망하면 대만도 망한다"며 "이 회사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펑은 2년 전부터 TSMC에 투자하고 있으며 그의 투자 포트폴리오 3분의 1가량이 이 회사 주식이다.
또 다른 투자자인 어거스트 추앙도 "TSMC가 대만을 대체 불가능한 첨단기술 공급처로 만들었다"며 "이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억제하고 있다. TSMC가 강해질수록 나와 우리 가족은 더욱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강조했다.
이들의 믿음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TSMC의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60% 이상으로, 세계 최대 규모다. 애플과 엔비디아 설계 칩을 포함해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 대한 사실상의 독점권을 지니고 있다.
내년에 대만에서 최첨단 2㎚(나노미터, 10억분의 1m) 반도체 생산에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인 가운데 대만 정부는 "가장 앞선 반도체 기술을 국내에 유지한다"는 방침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TSMC가 최근 일본 구마모토에 공장을 열고 미국과 유럽에 추가 공정을 건설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만을 핵심 생산기지로 키워간다는 것이다.
블룸버그는 이를 두고 "대만이 이른바 '실리콘 방패'의 혜택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짚었다.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게 되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는 만큼 TSMC의 존재만으로도 중국의 군사행동을 억제하는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이 대만을 보호하는 강력한 동기가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블룸버그는 "TSMC는 대만에서 국가를 수호하는 성스러운 산(護國神山, 호국신산)으로도 불린다"면서 대만인들이 안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로 TSMC 주식을 사는 것으로 여긴다고 전했다.
실제 최근 미국 공화당 대통령선거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만이 미국의 반도체산업을 모두 가져갔다. 대만이 미국에 방위비를 내야 한다"고 밝히면서 TSMC의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다. 당시 외국인 투자자들은 빠져나갔지만, 대만 내 소액투자자들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TSMC의 주가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전략자산으로서의 가치 외에도 TSMC가 대만 국내총생산(GDP)의 8%를 차지한다는 점 역시 개인투자자들이 매수에 나서는 동력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TSMC는 대만 주식시장 종합지수인 자취엔지수(Taiex Index) 가중치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韓, 정쟁에 치여 제자리걸음…'글로벌 패권 경쟁'서 뒤처질 수도문제는 대만은 물론, 주요 국가들이 반도체산업을 국가안보 수준으로 여기고 있지만 한국은 정쟁에 밀려 이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22대 국회 개원 두달간 여야간 반도체 논의는 전무했다. 미국, 중국, 일본 등이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쏟아부으면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너무 한가하다. 일각에서는 반도체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여야가 반도체산업을 특정해 발의한 법안은 모두 5건에 달한다. 연말 일몰 위기에 놓인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의 기간을 연장하자는 '스트롱 K칩스법'과 대통령 직속으로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보조금을 지원하자는 특별법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여야는 법안만 내놓은 채 국회에서 전혀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22회 국회가 문을 연 지 2개월이 지났지만, 그 사이 소관 상임위원회는 반도체 법안들을 논의한 적이 없다.
특히나 현재 발의된 법안들은 모두 세제 혜택, 인재 확보 등으로 업계가 기대하는 직접 보조금 지원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지만, 국회는 이마저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반도체산업에 드는 천문학적인 투자 규모를 고려하면 현금성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인다. AI 반도체 수요는 높아지는 가운데 미세화 공정은 한계에 다다른 만큼 국내 기업들은 나 홀로 수십조원을 조달해 공장 증설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중소‧중견기업에는 언감생심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거대 여당인 민주당이 탄핵과 포퓰리즘 입법 폭주를 멈추고 경제‧민생 살리기 법안 처리로 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된다. 주요국들은 전략산업 보호를 위해 무역갈등까지 불사하고 있다. 이제라도 협치를 유도해야 전세계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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