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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도네시아 제2대 대통령 수하르토의 생일입니다

국가영도위원회 청꿈실세

President_Suharto,_1993.jpg

 

수하르토(Soeharto)는 인도네시아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인도네시아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며,  인도네시아 최초의 우파 대통령이자 최초로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대통령인데, 그는 인도네시아의 경재개발의 아버지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인도네시아 최악의 학살자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뒤따르며, 오늘날까지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중 제일 논란이 많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1921년 6월 8일 네덜란드 식민통치 하의 인도네시아 욕야까르따술탄국(Kesultanan Yogyakarta)의 작은 마을 꺼무숙(Kemusuk)의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그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양부모의 손에 길러졌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며 지냈고, 이 때문에 남몰래 출세욕을 키웠다고 합니다.

 

이후 경제적 여건이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라면서 공부에 몰두했으며, 여러 번의 낙방을 거듭한 끝에 1 40년에 당시 인도네시아인으로 구성된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왕실육군(Nederlands Indisch Leger)에 입대했고, 태평양전쟁(Pacific War) 때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했을 때는 네덜란드군에 복무했던 신분을 숨기고 향토방위의용군(鄉土防衛義勇軍)에 입대해 중대장까지 올라갔으며,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한 뒤 네덜란드가 다시 인도네시아를 침략했을 때는 새로 만들어진 인도네시아의 정규군에 입대해 네덜란드군에 맞서 유격전을 이끌었고, 인도네시아가 완전한 독립한 뒤에도 고국인 욕야까르따술탄국을 인도네시아에 무력으로 병합시키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외 이슬람극단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전공을 세우며 진급코스를 밟아 장성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1965년,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Soekarno)의 독재정치에 반대하여 군부 안을 시작으로 6·30운동(Gerakan 30 September)이 일어나 7명의 장교들이 피살되고, 여파가 인도네시아 전국에까지 번졌는데, 이 때 그는 6·30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된 꼽깜띱(Kopkamtip)의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수도 자까르따부터 장악한 뒤,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발표하고 미국 CIA의 지원과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협조까지 받아가며 50만 명에서 300만 명까지 추산되는 무고한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끝에 이 운동을 진압했으나, 이후 숙군 작업을 통해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고 군부를 장악한 그는 수카르노에게 퇴임을 강요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1967년 자신이 인도네시아 제2대 대통령이 되어 인도네시아 최초의 군사정권을 수립했습니다.

 

대통령으로 집권한 그는 신질서(Orde Baru)를 표방한 반공우파독재를 실시했는데, 우선 국내로는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반대파들을 무력으로 탄압했으며, 각지 지방장관 반 이상을 군장교들로 임명해 모든 인도네시아 성(Provinsi) 안의 공산주의자와 분리주의자들의 근거지를 파괴했고, 국외로는 그간 인도네시아와 갈등했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과 화해하며 UN에도 재가입했고, 그 나라들로부터 지원을 얻어 경제발전에 유용하게 활용했으며, 또 그 나라들의 묵인 하에 인도네시아와 국경을 맞댄 소국 동부띠모르(동티모르)를 침공해 인도네시아의 성으로 병합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최소 90,800명, 최대 213,600명의 동부띠모르인들이 인도네시아군에 학살당했습니다.

 

이렇듯 그의 재임기간은 현대 인도네시아에서 제일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으나, 동시에 경제발전이 제일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특히 그가 실시한 경제개발 5개년(Rencana Pembangunan Lima Tahun) 계획은 그간 수카르노의 사회주의 정책으로 숨죽이고 있던 기업들이 시장에 전면으로 나서 인도네시아 경제를 이끌어갈 반석을 마련해주었고, 덕분에 7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인도네시아의 노년층은 아직도 그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정권은 서서히 폐단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의 가족들은 그가 밀어준 기업들과 정경유착을 형성하여 현대 동남아 지도자 가문 중 제일 막대한 비리를 저질렀고, 설상가상으로 90년대에 IMF 금융위기가 인도네시아에도 닥치자, 루삐아화가 폭락하여 기업들이 줄도산하는 바람에 인도네시아 경제는 다시 침체되고, 국민들도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도 하지 못해 그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반정부 시위대를 조직해 들고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자까르따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소요와 약탈이 벌어졌고, 특히 차이나타운에 있던 화인(중국인)들까지 피해를 입어 1,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제는 그의 독재를 봐주던 미국도 그의 정권을 지켜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그는 정권이양을 약속하고 1998년 대통령직에서 하야했으며, 당시 부통령인 B.J. 하비비(B. J. Habibie)가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완전히 권좌에서 물러난 그는 그간 횡령한 액수가 150~350억달러에 이른다고 검찰에 의해 밝혀저 전국적으로 분노를 샀으며, 국민들의 횡령액 배상요구와 외신들의 비판에도 귀를 닫고 집권세력의 비호 아래 자까르따의 자택에서 칩거하며 살다가 2008년에 건강악화로 인근 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다 1월 27일 병상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명유지장치가 제거되어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대통령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지고 유해는 먼저 사별한 영부인 시띠 하리띠나(Siti Hartinah)의 곁에 안장됐으며, 오늘날에도 그가 집권 때 저지른 학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그의 전반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진보층과 보수층으로 부정적 평가와 긍정적 평가가 갈리며, 그의 친족들 또한 현재진행형으로 구설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광에 힘입어 인도네시아 정계에서 제법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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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켈켈켈
    2023.06.08

    인도네시아를 좌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국부

  • 켈켈켈
    국가영도위원회
    @켈켈켈 님에게 보내는 답글

    냉전 동안 민족갈등과 이념대립으로 분열위기에 처한 인도네시아를 중앙집권화 시키고 경제호황을 20년 이상 이끌어온 걸 보면 여러모로 보통내기가 아닌 지도자임

  • 국가영도위원회
    켈켈켈
    2023.06.09
    @국가영도위원회 님에게 보내는 답글

    +짱깨 탄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