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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를 왜 지지하냐고

조철희 (218.237)

진짜 멋있어서

 

<한겨레 선임기자 김의겸>의 우충좌돌 ④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필자에게 ‘고마운 분’이다. 20여년 전 검사와 기자로 만난 이후 항상 따뜻하게 대해줬다. 가끔 기사거리도 주고 밥도 사줬다. 내기 바둑을 두면 일부러 져주는 게 티가 나곤 했는데, 아마도 기자 돈을 차마 따먹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거라 짐작된다. 하지만 홍준표를 좋아한 건 그 때문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변방 정신’이었다.

몇년 전 그가 낸 책이 <변방>이었다. 딱 어울리는 제목이다. 그의 출신 성분은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어서 오지에 가깝다. 낙동강변 하천 부지에 집을 짓고 살아 여름철 장마 때면 집을 떠내려 보내기 일쑤고, 양식이 없어 꼬박 3일 동안 굶은 적도 있다. 대학 때는 운동권이기도 했다. 글재주가 있어 여러차례 총학생회의 지하 유인물을 작성해주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멍석말이’도 당했다.

가난은 누군가에게 좌절을 안겨주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야망을 가르친다. 물론 홍준표는 후자다. 그는 보리쌀 두 말을 들고 대구로, 1만4천원만 쥐고 서울로 공부하러 갔다. 어린 나이에도 ‘중심으로 나아가야 산다’는 생존본능을 깨친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 죽도록 맞고는 풀려나자 마자 고시공부를 하러 절로 들어간다. ‘변방에서 중심으로’는 그가 도달해야 할 깃발이자, 그의 삶을 밀어붙이는 동력이다. 그리고 마침내 4선 국회의원, 집권여당 대표를 거쳐 현재 위치에 오른다.

사실 이런 류의 ‘가난한 놈이 머리 좋아 성공하는’ 출세기는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하다. 특히 정치권에는 한때의 명성에 올라타고 국회에 들어왔다가 명멸한 인간 유형이 숱하다. 그러나 국회의원 시절 홍준표는 이미 중심에 서있음에도 여전히 변방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읽어내고, 거기에 자신의 정치적 체중을 얹을 줄 아는 듯했다. 정치 분야에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최소한 정책 영역에서는 그랬다.

대표적인 게 ‘국적법 개정’으로, 이중국적 한국인을 향해 거침없이 저격을 가했다. 병역 의무를 마치지 않으면 한국적을 포기할 수 없도록 했고, 국적을 포기한 아이들은 한국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하도록 했다. 변방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 속 맺힌 응어리를 들여다볼 줄 아는 것이다.

‘아파트 반값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 정책은 처음 제기됐을 때만 해도 엉뚱한 얘기로 들렸으나, 강남 집값이 폭등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면제해주고 부유한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더 내게 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정책들과 관련해 “내가 보수적인 한나라당의 중진 의원이지만, 여전히 나를 버텨주는 힘은 가진 자, 힘있는 자에 대한 분노”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농협조합장의 부정에 억울하게 휘말려 경찰서로 잡혀가는 등 무시당하고 짓밟혔던 아픔이 여전히 그의 의식 밑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가 강퍅하게 보이지 않았던 건 그의 걸쭉한 입담 때문이다. 그의 대학 시절 별명은 황당무계의 준말인 ‘무계’였다. 농담을 잘해서 MBC 코미디프로 PD가 코미디언 시험을 보라고 권했고, 실제로 응시하려고도 했다고 한다. 그는 “그때 합격했으면 개그맨 김병조나 이용식씨 등과 동기였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가 복잡한 정치적, 정책적 현안을 단순화시켜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의 변방 정신에서 나온 산물로 해석됐다.

 

 

<한겨레 성한종 선임기자> "기자들과 친했던 홍준표 검사는 어디로 갔을까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 검사였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 검찰은 경북고-서울법대 출신들이 ‘주류’였습니다. 대검찰청과 서울지검 요직을 경북고-서울법대 출신 검사들이 독차지했습니다.

검사들은 경북고 출신을 당시 가장 비싼 생선회였던 ‘광어’에 비유했습니다. 경북고가 아닌 대구·경북 지역 고교 출신은 ‘도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밖의 다른 지역 고교 출신들은 ‘잡어’라고 했습니다. 극심한 경북고 편중 인사의 배경은 경북고 출신 노태우 대통령과 권력 실세 박철언 의원이었습니다.

홍준표 검사는 대구에 있는 영남고등학교 출신이었지만 ‘도다리’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기질이 권력에 추종하지 않는 ‘이단아’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경북고 출신 검사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자 김영삼 대통령이 나온 경남고 출신들이 검찰 안에서 약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홍준표 검사는 경남 창녕 출신이었지만 피케이(부산·경남) 정권에서도 아무런 덕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이 바뀌었어도 역시 검찰 내 비주류였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홍준표 검사는 기자들과 무척 가까운 검사였습니다. 그는 정의감이 유난히 강했고 그런 그를 기자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는 재벌 사주와 권력 실세의 비리와 범죄 단서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추적했습니다. 당시 기자들은 함승희 검사와 홍준표 검사를 ‘거악’과 맞서 싸우는 특수부 검사의 전형으로 평가했습니다.

홍준표 검사는 수사 내용을 적절한 수준에서 기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검찰 수뇌부의 수사 방해를 돌파하기 위해 언론을 적절히 이용할 줄도 알았습니다. 검찰의 잘못된 인사를 기자들 앞에서 성토할 수 있는 배짱이 있었습니다. 그가 기자들과 어떤 관계였는지 자서전에 일부 써 놓았습니다.

 

“그 사건 수사 도중 검찰 고위층은 끝없이 수사중단을 요구하면서 수사 방해를 했으나 D 일보 기자들의 도움으로 나는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었다.”(2005, 나 돌아가고 싶다)

 

“퇴근했다가 한밤중에 다시 검찰청으로 돌아온 남부지청 간부는 대검 지시라면서 담당 국장의 신병을 풀어주라고 했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간부의 뜻대로 석방을 결정하고 새벽에 집으로 차를 몰고 가려는데, D 일보의 L 기자가 내 차 문을 열면서 덥석 옆에 탔다. 그는 노량진 사건의 내막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신문사 사회2부장이 피해자의 친척이어서 노량진 수산시장의 경영권이 강탈당하는 과정과 관련 인물들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올림픽 도로를 타고 개포동 집으로 가는 30여분 동안 나는 사건의 공개 여부를 고민했다. 그날 새벽까지 나는 그 기자에게 사건의 전모를 알려주고 기술적으로 공개하라고 했다. 어차피 수사하지 못할 바엔 언론의 힘을 빌려 수사를 계속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2009, 변방)

 

“경찰청장, 치안감, 병무청장, 6공 황태자, 고등 검사장 3명 등 40여명이 연루된 초대형 사건을 대검 중수부도 아니고 지검 특수부도 아닌 강력부 검사 몇 명이 뭉쳐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수사 이후 나는 별종으로 취급받으면서 검찰 내부로부터 철저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중략) 그 이후 나는 일 년 동안 나를 찾아오는 기자들과 내기 바둑만 두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2009, 변방)

 

 

홍준표 검사는 기자들과 허름한 술집에서 술도 자주 마셨지만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술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술집이 문을 닫으면 기자들을 자신의 집까지 데려가서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홍준표 검사의 이런 기질은 국회의원이 되고 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홍준표 의원은 정치부 기자들과 잘 지냈습니다. 속을 털어놓고 얘기했지만, 기사가 잘못 나가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기자들과 신뢰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앞뒤 안보고 권력수뇌부를 향해 돌진하는 정의로운 검사이자 조폭 저승사자

 

저희와 함께 했으면 노무현대통령 다음 홍준표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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