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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의 정치인생 1편 전설의 시작

청꿈용

한국판 피에트로 검사, 組暴 검사, 풍차에 돌진해 들어간 동키호테 검사, 통제 불능의 소신 검사, 이른바 인기 절정의 김영삼 대통령 사인을 두장 받아야 그의 사인 한장과 바꿀 수 있는 탤런트 검사….

 

모래시계 검사 그는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의원

안기부의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엄삼탁 병무청장을 구속되게 하여 안기부에도 상처를 입혔고 문민 정부 초대 경찰청장 이인섭, 천기호 치안감을 구속하여 경찰 조직에도 상처를 입혔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검찰 고위 간부들이 옷을 벗었고, 검찰총장이 경질되는 대변혁을 몰고 왔으며 이 사건으로 파면된 공무원도 삼십 여 명에 이르렀다.

 

법무부의 특수법령과로 발령


국가 조직속에는 장치 오게 될 통일을 대비하여 여러 가지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법무부에서도 통일 국가의 법령 제도에 대해 연구를 하는 기구가 있다. 그게 바로 특수법령과의 할 일이다.

특수법령과의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가 우리에 앞서 통일을 이룬 독일의 법령, 제도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연구하는 작업이었다.

 

더 이상 수사 검사를 할수 없게된 홍준표는 검사 사표를 낸다 1996년 1월 25일 늦은 밤, 노무현과 유인태 등 민주당 전·현직 의원들이 홍준표의 집을 찾았다.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 날린 홍준표를 당에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민주당이 한발 늦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홍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보수 여당인 민자당 입당 약속을 받았다. 홍준표가 민자당을 택한 것은 지금의 보수 거물 홍준표를 만든 첫 번째 결정적인 순간이다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송파 갑 선거구로 출마해 현직 의원인 자유민주연합 조순환 후보를 이기고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그는 초선 소장파에 불과했지만,

1996년 9월 어린이와 청소년의 노동 가능 최저 연령을 만 15세로 상향 조정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오늘날 근로청소년법이 홍준표의 제 1호 법안이였다

 

이후 동협의회 총무 오 아무개 씨에게 2천 4백만 원의 선거운동비를 주고 허위 지출보고서를 제출한 혐의로 기소되어 당선 무효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

당초 검찰은 불기소처분(1996년 10월)을 내렸으나, 야당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곧 이듬해 1997년 2월 21일 법원은 야당 측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대법원 판결을 하루 앞 둔 1999년 3월 8일에 국회의원직을 자진사퇴했으며, 이튿날에 대법원은 벌금 5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 홍준표는 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하게 되었다

 

2000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DJ와 영수회담을 갖고, 추경예산 편성과 남북 경협자금을 승인해주는 대신 홍준표 등의 사면에 합의했다. 그 해 광복절 특사 때 사면돼 피선거권을 회복한 그는 2001년 치러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을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국회로 복귀했다.

 

홍준표 전설의 시작 동대문구 을

 

2002년 김대중 대통령의 3남 김홍걸의 미국 은행 입출금 내역을 공개해 3달 동안 23만 달러, 1달 평균 8,700만 원이라는 비정상적인 금액이 인출된 사실을 폭로하였고 검찰이 이에 대해 수사에 들어가게 했다. 곧 검찰은 김홍걸이 최규선에게서 3억 원을 수수한 혐의를 적발했고, 김대중 정권을 뒤흔든 최규선 게이트가 터지면서 결국 김홍걸이 구속되었다

 

이후 2004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고배를 마실때 홀로 당선 되는 기염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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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홍준표법이라고 불리는 국적법을 발의 통과 시킨다

 

 

https://youtu.be/l4lb9N1PtAA

 

이를 통해 또다시 일약 스타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홍준표 의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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