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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소설)이회창 대통령(1편 김영삼 정부의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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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대통령은홍카콜라 청꿈모험가

이회창, DJP에 “두 정치 9단의 현란한 재주에 환멸”

15대 대선의 결과는 어느 세계와는 차원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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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변곡점은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지미 카터의 방북 이후 김일성이 1994년에 급사하지 않으면서 예정되어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

남측의 김영삼 대통령과 북측의 김일성이 서로 만나 악수하고 처음으로 정상끼리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당시 인기가 높았던 김영삼 정부의 인기는 하늘을 찔러 이는 북한과의 대화를 주장하던 진보층의 지지 흡수와 좌파와 우파의 의견통합, 김영삼 정부의 정치수명을 결정적으로 늘리는 일석삼조의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로 인한 가장 큰 소득은 김일성으로부터 핵무기 개발 "보류" 선언을 얻어냈다는 데에서 비핵화에 한층 더 다가갔다는 평가가 나왔다. 1993년에 있었던 수많은 개혁과 1994년의 제1차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해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부울경(PK) 지역에서는 89%의 지지율을 얻었고,

전체 지지율로는 44%의 지지율에서 65%까지 치솟았다.

사회적으로도 1994년은 김영삼 정부에게는 겹경사의 해였다. 각종 사건사고들에 문민정부가 생각보다 섬세하게 대처하고 이로 인해 높은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도 반영되어 사고는 전 정권의 책임이라는 김영삼 동정론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김영삼 정부는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마저 극복하며 인기가 다시 한 번 하늘을 뚫는다.

김종필, 과거 박근혜에 쓴소리한 인터뷰 화제 : 국회·정당 : 정치 : 뉴스 : 한겨레

정치적으로도 경사의 연속이었는데, 김영삼 대통령과 민주자유당이 김종필과 김종필계에 대해서 "신중론"을 펼치면서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에서 축출당하지 않고, 김영삼이 직접 김종필과 만나 극적으로 합의를 보면서 김종필은 대표직을 온전히 수행하여 자민련이 탄생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민주당이 더욱 더 고립된 것은 물론,

 7인의 대통령]민주주의의 거산 김영삼, 신한국을 창조하다…“권위주의는 한계”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현실보다 수많은 득을 본 김영삼 정부의 지지율은 1994년동안의 과오를 덮어버렸고 1995년 제 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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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결과보다 훨씬 압승하면서 김영삼 정부의 끝없는 인기는 1996년까지 이어졌다.

88세로 영면한 고 김영삼 대통령 < 월요기획 < 월요연재 < 기사본문 - 월요신문

그러나 김영삼 정부도 계속 지지율을 얻을 수는 없었고, 상관없이 계속 터져나오는 사고들로 지지율이 점차 뚝뚝 떨어져나가자,

김영삼 대통령이 꺼내든 카드가 있었는데, 바로 노동법 개정이었다. 노동법 개정은 실제 역사에서는 날치기 통과라는 비판을 받으며 김영삼 정부에게 타격을 줬지만, 오히려 이 세계관에서는 큰 이득을 주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노동법 개정 과정을 지켜보며 노동자에 유리한 쪽으로 수정하는 정치적 계산을 했고, 이는 기업의 반발을 샀으나 지지율이 급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노동자에게 유리한 노동법 개정을 강행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다시 29%에서 56%까지 치솟는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김영삼 정부의 개혁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김영삼 정부는 결국 임기 말까지 지지율을 굳건히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총선과 대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 안해요 제가 안 해요" 의 뜻과 의미 : 네이버 블로그

한편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인터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마지막 도전으로 다시금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총재는 다가오는 총선에서 이기적으로 창당을 했다며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친북 논란과 신한국당의 김대중 비자금 폭로 의혹까지 김대중 총재는 정계복귀를 하자마자 수많은 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1997년 '이회창 전략문건' 파동의 앞뒤 - 세상을 보는 다른 눈 "뷰스앤뉴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김영삼 대통령과도 마찰을 빚었던 대쪽 국무총리 "이회창"이 민주자유당 개혁과 3김이 아닌 신시대정치를 내놓으며

순식간에 민주자유당 당권주자로 부상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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