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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분의 크리스마스> -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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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영

  어제와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그러나 다른 인물, 나는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어제와 완전 다른 느낌이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있었다. 2년전에 느꼈던 그 감정... 그것인 것 같다.

 

영화관으로 가자!”

 

나는 마음과는 달리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2년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 말투였다. 내 말투는 그때와는 달리 차가워져 있었다.

 

  우리는 영화관으로 가서 영화를 봤다. 어제 주인아와는 액션 영화를 봤다. 주인아는 공포 영화, 액션 영화같이 역동적인 영화를 좋아했다. 반면 오늘 단은비와는 멜로 영화를 보러 왔다. 우리는 둘 다 멜로영화를 좋아했다. 중학생때도 같이 멜로영화를 보고 서로 눈시울이 붉어지며 하루종일 영화 얘기를 한 적도 많았다. 오늘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영화 속의 주인공에 왠지 모르게 감정이입이 너무 되었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암에 걸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남자친구를 일부러 외면하며 혼자 고통스러워했다. 결국 여주인공은 자신의 진심을 담은 편지 한통을 남긴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도 슬펐다. 옆을 힐끔힐끔 살펴보니 단은비의 눈가도 촉촉해져 있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와 밥을 먹으러 갔다. 주인아와는 항상 양식을 먹으러 갔지만 단은비와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갔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먹으러 갔다.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가봤을만한 숨겨진 맛집이었다. 나는 이 익숙함이 너무 좋았다. 양식집은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가격에 비해 음식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컸는데 여기는 맛과 양이 전부 넉넉했다. 단은비 역시 같은 생각일 것이다. 단은비는 역시나 아저씨들처럼 맛있게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향했다. 어제 주인아와 갔던 카페, 선미 누나와도 갔었던 카페, 카페를 자주 가지는 않지만 간다면 항상 이곳을 주로 간다. 오늘도 단은비와 이곳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단은비가 색다른 제안을 했다.

 

선우야, 우리 그냥 테이크아웃해서 산책하면서 마시자!”

 

산책? 어디로?”

 

도라지 공원!”

 

  도라지 공원이라는 장소가 다시 언급되었다. 어제는 갈 수 있었지만 가지 않았던 장소, 오늘 이곳에 간다면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가 써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러자.”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내 심장은 이미 쿵쿵 뛰고 있었다. 얼마 만에 단은비와 정식으로 도라지 공원을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커피는 저기서 사자! 네가 가는 곳보다 훨씬 싸! 어차피 안에서 마실 것 아니면 굳이 거기 갈 필요 없잖아?”

 

  정확한 지적이었다. 나는 커피맛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평소에 가던 카페를 갈 이유가 없었다. 단은비는 때로는 정말 경제적이기도 했다. 나의 사정을 생각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일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저런 단은비의 모습을 정말 좋아했었다.

 

  우리는 커피를 사들고 도라지공원으로 왔다. 시간은 9시가 가까이 되어갔고 차가운 초가을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추웠지만 춥지 않았다. 나는 춥지만 따스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어쨌든 말없이 떠난 것은 무조건 내가 잘못한 게 맞아. 정말 미안해!”

 

단은비가 뜬금없이 내게 사과했다. 괜히 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 정말 단은비를 차갑게 대했었지. 물론 그럴만 하긴 했지만...

 

그래, 너 가고 너무 힘들었어. 말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덜 했을텐데 말도 없이 떠났잖아. 그래서 화가 안날수가 없었어. 어쨌든 내가 너한테 과하게 말했던 부분이 있으면 나도 사과할게. 미안해!”

 

아니야, 전부 내가 자초한 일인걸... 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갈수록 나도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사과하는 단은비의 진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저 반짝반짝한 눈, 명료한 말투, 단은비는 평소에 거짓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저 말은 분명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왜... 왜 나를 그렇게 떠났던 것일까? 그것만은 꼭 알고 싶었다.

 

그때 떠났던 이유, 진짜 안 알려줄거야?”

 

응 미안해, 그건 말 못해.”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나한테 말을 못하는 것일까? 나는 단은비에게 내 모든 얘기를 다 해줬다. 심지어는 가장 아픈 부분인 아버지 얘기와 떠난 어머니 얘기까지도 했었다. 그런데 단은비는 왜 나에게 본인의 얘기를 숨기는 걸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내가 널 이용하고 그런 것은 절대 아니야! 그것만 믿어줘!”

 

  단은비는 또다시 나에게 믿어달라고 하고 있었다. 예전과 같은 패턴이다. 그런데 이제 내 태도는 달라졌다. 그동안 단은비를 미워했던 마음이 차츰 눈 녹듯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면 이해해줄만도 하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그 얘기는 자연스럽게 해주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이 순간만큼은 단은비의 진심이 느껴진다. 나는 그런 진심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 다 이해해! 언젠가 말할 준비가 되면 나한테 그때 얘기 꼭 해줘!”

 

!”

 

  그렇게 지난 2년간 쌓아왔던, 단은비를 향한 내 증오는 끝났다. 속이 편했다. 그동안 증오와 사랑을 동시에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증오를 끝냄으로써 사랑의 감정만이 남게 되었고 나는 비로소 2년 만에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 이거 아직 가지고 있었어. 예전에 던져버렸다는거 다 거짓말이야. 그땐 네가 너무 미워서 그랬어. 이걸 내가 어떻게 버리겠어?”

 

  나는 퍼플시계를 꺼냈다. 단은비는 시계를 보고 말없이 웃었다. 정말 아름다움 웃음이었다. 단은비의 별목걸이 역시 달빛을 비추며 어느 때보다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그동안 못했던 얘기를 나누며 도라지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지난 2년간 어떻게 지냈는지 우리는 신나게 얘기했다. 단은비도 몸도 안 좋은데 타지로 가서 정말 많은 고생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우리는 다시 공원의 시계탑 앞에 섰다. 우리 둘에게는 여러 가지 역사가 있는 참 뜻깊은 공간이다. 순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이곳에서 오늘 새 역사를 만들 수도 있다. 나는 선미누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 마음이 가는대로 해!’

 

아버지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사람을 슬프게 하지마라.’

 

  이 말들은 결국 공통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 내 마음에 솔직해지고 정확히 표현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어제 마지막으로 봤었던 주인아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런 주인아를 위해서도 나는 이제는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이제부터 나는 솔직해질 것이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은비야, 여기 시계탑에서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그중에 제일 중요한 일! 2년전에 여기서 우리 첫사랑이 시작되었잖아.”

 

응 그랬지...”

 

생각보다 반응이 냉랭한 것 같기도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밝았는데 왜 저러는 걸까?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제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우리 이제 지난 일은 다 잊고 깔끔하게 다시 시작하자! 지난 번엔 네가 먼저 고백했지만 이번엔 내 차례야.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나는 자신있게 말을 내뱉었다. 내 마음이 어떤지 이제 정확히 파악하고 그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이제 단은비의 대답만이 남았다. 단은비도 돌아온 후 계속해서 나에게 관심을 표현했다. 분명 긍정의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단은비를 쳐다봤다.

 

하지만... 단은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뜻밖의 대답이었다. 나는 다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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