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보다 참혹했던 재앙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
프롤로그
사람이 죽어가는 나라에
들어오는 곡식보다 빠져나가는 곡식이 더 많다.
이 아사(餓死)의 집단 학살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
먹을 것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태양을 한 번 쳐다본 후,
누추한 초가(草家)의 문을 만들었다.
자신들이 죽어가는 모습과 신음(呻吟)을
남이 보거나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몇 주가 지나고 나면
난롯가에서는 해골만 발견되었다.
2년전부터 지구촌 전역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댓가인가?
아니면 인간의 환경파괴 죄과에 대한 신의 분노와 저주 때문인가?
지금 현재 코로나 팬데믹을 피해간 나라는 지구촌 전역에 단 한 곳도 없다.
미국도, 영국도, 독일도, 프랑스도, 아일랜드도,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아일랜드 땅에서는 1845년부터 1851년까지 7년 동안
코로나보다 참혹한 재앙인
‘감자 대기근’이라는 참사(參事)가 있었다.
‘감자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 땅에서는 백만 명이 굶어 죽고,
백만 명이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문제는 감자 대기근에서 비롯된 아사(餓死)의 집단 학살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였다는 사실이다.
아일랜드는 전통적으로 농업 국가였다.
전 유럽으로 번지던 산업혁명조차 대기근 동안 이 땅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아일랜드는 늘 영국의 곡창지대 역할을 했으며,
인구의 70%를 점유했던 농민들은 거의 모두가 자기 땅이 없는 소작농이거나 영세 농가였다.
소작농이나 영세 농가는 값비싼 임대료를 내기 위해 밀, 보리, 귀리 같은 환금성(換金性) 작물을 재배했지만,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보관이 힘든 감자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 아일랜드의 인구는 가톨릭 국가의 특성상 가족 계획의 금지로 인해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꾸준히 증가했다.
1845년 무렵에 급격하게 늘어난 빈민층이나 농촌 사람들의 주식(主食)은 대부분 감자였다.
남녀노소 600만 명이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모두 감자로 때웠다.
한 사람이 하루에 먹는 감자의 양은 대략 3~6㎏이었다.
삶아서 먹고, 구워서 먹고, 버터밀크와 양파를 섞어 으깨 먹기도 했다.
케이크, 빵, 수프 재료도 감자였다.
사람뿐 아니라 돼지, 소, 닭들도 감자를 먹고 살았다.
그런데 1845년 감자 농사가 흉작이어서 대재앙이 발생한 것이다.
감자의 푸른 줄기들이 쑥쑥 꽃잎을 밀어내고 있을 때였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뜨거운 비라도 내린 듯 온 들판의 감자들이 쓰러져 누웠다.
하룻밤 사이에 까닭 모를 전염병이 발생하여 감자밭이 검게 변해 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싱싱했던 감자 잎들이 하룻밤 사이에 말라비틀어지고,
600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에게 사실상 유일한 식량인 감자가 몽땅 썩어버린 것이다.
당시 감자의 손실은 대략 6백만 파운드로 추산되었다.
농부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도대체 알 수가 없어 하늘만 쳐다보았고,
그사이 감자는 뿌리까지 썩어들어 갔다.
이 감자 잎마름병(Potato Blight)은 허리케인(hurricane)처럼 메이요(Mayo), 슬라이고(Sligo), 골웨이(Galway), 코크(Cork) 등
서남부해안 지방을 삽시간에 강타하더니,
내륙을 거쳐 동쪽으로 빠져나가면서 기세가 조금씩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 기근 동안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겔탁트(Gaeltacht, 게일어 사용 지역) 지역’이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감자밖에 없던 사람들이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굶어 죽거나 집에서 내쫓긴 채로 벌판이나 거리에서 죽어갔다.
때로는 지주의 집 앞에서도 죽어 나갔다.
지주들의 풍성한 식탁과 먹고 마시고 즐기는 그들의 파티를 바라보면서 원망과 탄식 속에서 죽어갔다.
일부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지주는 소작인들에 대한 책임을 구호 기관(무료 급식소, Soup Kitchen, 수프 공급센터)’에 내맡긴 채
그들을 쫓아내기에 급급했다.
또한, 전염병이 창궐(猖獗)했다.
굶주림을 잘 견디던 사람들조차 결국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콜레라, 이질, 괴혈병 등과 같은
전염병에 걸려 생명을 잃었고,
이 질병들은 아사자(餓死者)들보다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으며,
시체들이 여기저기서 부패하여 심한 악취를 풍겼다.
이 기간에 흉작은 오직 감자뿐이었다.
소작인들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에도 밀, 보리, 귀리는 풍작을 이루었다.
이들을 재배한 지주와 영국 상인의 창고엔 곡식 자루가 가득 쌓여 있었다.
또한, 수십만 명이 죽어가는 동안에도 아일랜드의 각 항구에는 연이어 수출용 배가 떠나가고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밀, 보리, 귀리, 옥수수, 그리고 최상의 양모(羊毛, wool)와 섬유는
다른 나라도 아닌 영국으로 실려 나가고 있었다.
수출품이 배에 실리는 동안 영국 정부는 보호법을 발동하여 야간 통행을 금지했고,
군인과 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서 선적(船積)을 보호했으며,
매년 그렇게 실려 나간 알곡의 양은 평균 225만 톤으로,
이는 아일랜드의 모든 인구를 넉넉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충분한 양이었다.
이때 수입된 곡물은 단지 배 한 척의 인디언 옥수수뿐이었다.
물론 미국으로부터 가끔 구호 곡물 선(船)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 곡물 선박이 아일랜드의 항구에 정박하면
선원들은 아일랜드의 식량이 다른 나라로 실려 나가는 수척의 배를 목격할 수 있었고,
이때 그 배를 타고 온 미국의 어느 평화 운동가는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나라에 들어오는 곡식보다 빠져나가는 곡식이 더 많다.
이 아사(餓死)의 집단 학살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됐던 참혹한 7년의 기근이 끝나던 해인 1851년 아일랜드의 땅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1845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당시 아일랜드의 인구는 80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1845년부터 1851년까지 지속된 대기근으로 인해
대략 100만 명이 굶주림 혹은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콜레라, 이질, 괴혈병 등과 같은 전염병으로 죽어 나갔다.
또 다른 100만 명은 살길을 찾아 머나먼 이주 길에 오르기 전날 밤
가족 및 친구들과 ‘아메리칸 경야(American Wake, 아일랜드의 장례 전통에서 생겨난 송별회)’를 보낸 뒤,
당시 ‘관선(官船: 주검의 배, coffin ship, famine ship)’으로 불리던 낡은 배에 몸을 싣고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배에 이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된 연유는,
승선한 사람들의 대략 1/5이 항해 중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런던 타임스(London Times)는
“머지않아 아일랜드에서 사는 아일랜드인들의 수는 미국에서 사는 인디언만큼이나 드물게 될 것이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오늘날 아일랜드 인구는 640만 명(남아일랜드 460만, 북아일랜드 180만)으로
아직도 대기근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때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오던 아일랜드어(게일어)를 버렸다.
신으로부터는 믿음, 정치적으로는 애국심, 그리고 가정에서는 화목을 안겨주었던 그들 고유의 언어였다.
영국인들이 영어를 사용하라고 강요할 때도,
부자나 지주들이 영어를 잘 구사하여 그들의 부를 보장받을 때도 버리지 않고 지켜오던 언어였으나,
기근과 아사 앞에서 더는 지켜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대기근 자체는 지진이나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정책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은 전 세계 땅덩어리의 1/4 지역(3,300만km2)에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하여
‘해가 지지 않는 제국(An Empire under the Sun)’으로 군림했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자유방임 경제정책, 인종 편견, 종교적 갈등 등으로
아일랜드인들의 곤경에 눈을 감았으며, 당연히 했었어야만 할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존 미첼(John Mitchel, 1815~1875)은
“감자를 망친 것은 물론 신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영국인들이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영국에 비판적 시선을 가진 아일랜드인들은,
영국 정부가 “1800년부터 1845년까지 45년에 걸쳐 두 배로 증가한 인구를
격감시키기 위해 재앙을 십분 활용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1845년부터 1851년까지 벌어진 재해를
자연재해로서의 ‘기근(Famine,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서 굶주리는 것)’이 아니라
인재(人災)를 의미하는 용어 ‘고르타 모르(Gorta Mór: Great Hunger, 굶주림, 기아)’로 칭한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이후로 아일랜드인들이 영국 정부와 영국인들에 대해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적대감, 증오심, 그리고 한(恨)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감자 대기근 있은 지 168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2013년
영국과 독일 연구진이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을 찾아냈다.
범인은 학명(學名)이 ‘파이토프토라 인페스탄스(Phytophtora Infestans)’로 곰팡이와 비슷한 단세포 생물이었다.
‘파이토프토라’라는 말은 그리스 말로 ‘식물 파괴자’란 뜻이다.
연구진은 영국과 독일 식물원에 보관하고 있던 1845~1896년 사이의 감자 잎에서 DNA를 추출하여
유전 정보 전체를 해독함으로써 ‘HERB-1’이라는 ‘파이토프토라’ 변종이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임을 밝혀냈다.
그 이전에는 동시기에 미국에서 감자 잎마름병을 유발한 ‘US-1’ 변종이 범인으로 지목돼왔었다.
또한, 그 변종 병균이 남미 대륙에서 건너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남아메리카 페루에서 들여온 구아노 비료에 진균(fungus)이 묻어왔다는 것이다.
당시 아일랜드의 농민들은 감자 수확량 증대를 위해 바닷새 배설물로 만든 비료를 수입했기 때문이다.
대기근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아일랜드인들의 영혼 깊숙이 사무쳐 있으며,
수많은 소설, 발라드, 시, 노래(최근에 시네이드 오코너는 ‘기근’이란 타이틀로 된 노래들을 부르고 있음) 형식으로
아일랜드인들의 ‘문화적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또한, 대기근 발생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에 로스코먼(Roscommon) 주(州)의 스트록스타운 파크 하우스(Strokestown Park House)에 세워진
‘대기근 박물관(The Irish National Famine Museum)’은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에게 무언의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2세기 전 19세기 중반, 코로나보다 끔찍했던 ‘감자 대기근’의 재앙을 이겨낸 아일랜드인들은,
코로나에 굴복한 정도로 나약한 국민이 결코 아니다.
아일랜드인들은 오늘날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 위기를 능히 극복해 내고,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맞아 ‘지구촌 문화의 주역’으로 다시 한번 크게 용틀임할 것이다.
작지만 강한나라 아일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