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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 습작

청년대한

신(新) 사의 찬미

 

마지막 층계참을 지나 소년이 마주한 저녁 노을은 과연 잔인하리만큼 붉었다. 무엇을 위해 걸어온 길이던가, 되뇌었던 그는 이내 처음이자 마지막일 희망을 향해 있는 힘껏 뛰었다. 외마디 절언도 없이, 오직 스산한 고요만이 그가 사라진 배경을 맴도는 어느 쓸쓸한 겨울이었다. 늘 끄적이다 만 사세구 대신 즉흥적인 인사말을 남기고, 늙은 소년은 자신의 젊은 이상과 함께 깃털이 흩날리는 속도로 몰락해갔다.

“설령 내가 추락하지 않았더라도, 본인이 이어갔을 내일은 애당초에 잿빛으로 침윤되어 그 형태조차 모호했을 것이다. 나의 존재는 연속되었을 언정, 미래에 대한 긍정은 필경 부재했을 것이다. 나에게 허락된 최후의 자유는 찰나의 설렘을 안기고 사그라지는 불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마저 불허된 획일적인 부자유보다는, 차라리 표류하는 자유에 삶을 기꺼이 기대리라. 조악한 일엽편주나마 붙잡고 해방을 향해 항해하고 싶은 마음만 한 가득이었다”.

소년의 삶을 거꾸로 매달아보자. 사위로부터 조여오는 구속은 그의 목을 지긋이 압박해왔다. 변변치 못한 기량은 그를 누구보다 난처하게 만들었고, 궁핍한 생활은 평범한 일상을 더욱 한미하게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결손은 제발 저리듯 감추기 급급하였었기에, 그의 주변에는 일말의 자기비판조차 쉽사리 수용하지 않는 아집만이 똬리 틀듯 들어차 있었다.

“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남이 확실하다. 분명 축복받았을 출생이 점차 비천한 일생으로 뒤바뀌어, 어느새 스스로조차 세간의 동정을 편리하게 여길 정도였다. 타인의 연민에 무임승차하는 일상은 종종 심각한 자기부정을 초래하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류의 수치스러운 반문들조차 삶의 어느 순간서부터는 더는 나의 뇌리를 스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마침내 스스로에 대한 회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시종일관 다채로운 합리화로 가난했던 소년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치사량의 편협과 독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안일함 너머 내밀한 공포심 이면에 터잡은 살인적인 오만은 기꺼이 숙주의 육체를 희생하여 이 모든 현실적인 복잡함으로부터 도피하려 들었다. 직각적인 문제들에 대한 가장 직선적인 해답만을 강요하는 그의 단차원적 사고방식은 종국에는 극단으로 치달었다. 물론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있어 수반되어지는 고통은 오롯이 숙주의 몫이었다.

“나는 처음 지면에 내딛었던 걸음마 그대로, 모든 걸음은 새롭게만 다가왔다. 하강 때의 바람을 마시기 위해 혀는 조금 더 내밀어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한 찰나, 최후의 동심은 곧 문드러질 내 몸을 염하듯 한껏 꽃피었다. 마치 곧 싸라기눈을 뚫어내고 피어오를 매화처럼, 체념에 매몰된 나의 신체 군데 군데 붉은 홍조가 돋아났다. 한층 고조된 온 몸의 신경은 점점 무디어져만 갔다”.

소년은 비이성의 내재화를 통해 유년기로의 회귀를 꾀했을지도 모른다. 젖먹이 때의 어리광과 작금의 우행은 그러나 선명한 대조만을 이룰 뿐이었다. 잠시간의 숙고를 마치고서 난간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이윽고 그는 눈을 질끈 감아 보였다. 마치 그의 처연한 얼굴이 더는 구겨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한 표정이었다. 집중하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온 혀는 과연 유아기적 퇴행의 발로였을까.

“나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존엄의 참뜻을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 자유낙하 도중 그 어떤 유의미한 저항도 느끼지 못했다. 눈을 떠보니 주변이 너무 빠르다. 공허함이 심장을 쥐어짜고 센바람에 눈물이 절로 차오른다. 나는 티끌없이 깨끗한 사람이었을까. 후회는 없을 줄 알았건만. 갑자기 어지럽다. 이게 아닌데. 사고가 빠르다. 새로운 느낌. 어두운 지면. 다가온다. 어쩌지. 그만. 그만. 그만. 씨…”.

꼭대기에서부터 수직으로 고꾸라진 소년의 상체는 끝없는 심연으로부터 또다른 시작을 향해 가속하기 시작했다. 점점 더 머리 쪽으로 쏠리는 바람은 그의 시야를 방해하는 듯 보였다. 마치 자신의 선택에 대한 회한이 투영되어진 듯, 그의 유쾌하지만은 않은 표정은 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함께 그늘져갔다. 그가 예정했을 비탄도, 그에게 드리운 허무도, 이제는 흉측한 속도로 하강하는 본질에 대한 한낱 미사여구에 불과할 터였다.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다발성 골절, 장기부전, 소생가능성 희박.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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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가영
    2021.12.23

    와우... 표현력이 너무 좋으시네.. 자주 올려주세요

  • 유가영
    청년대한
    작성자
    2021.12.23
    @유가영 님에게 보내는 답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