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월남전쟁에 관한 글을 올려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절충형으로 월남전쟁 당시 월남땅 이남에 있었던 월남공화국(Việt Nam Cộng hòa), 줄여서 남부월남(Nam Việt Nam)으로 불리는 나라에 관한 역사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역(Chiến dịch Điện Biên Phủ)에서 월맹(Việt Minh)이 프랑스군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고, 그해 7월 21일 제네바협약(Conventions de Genève)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월남은 북부에는 월맹정권이 세운 월남민주공화국(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으로, 남부에는 프랑스가 세운 괴뢰국 월남국(Quốc gia Việt Nam)으로 분단되었는데요, 이 월남국이 바로 월남공화국(Việt Nam Cộng hòa)의 전신입니다.
(가운데 그림 속 인물이 바로 월남국 말대 수상이자 월남공화국 초대 대통령 오정염.)
그리고 1955년 10월 23일, 완조(Nhà Nguyễn)의 마지막 군주라는 이유로 월남국 주석에 추대되었던 보대제(Vua Bảo Đại)의 탄핵을 향한 총선거가 시행되어 (선거개입이 가미된) 5,721,735표로 보대제는 국가주석직에서 탄핵을 당하고, 말대 수상 오정염(Ngô Đình Diệm)이 국가주석 권한을 대행하여, 3일 후 그를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월남공화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방미한 오정염 남부월남 대통령과 악수하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오정염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그와 밀교가 있었던 미국의 아이젠하워(Eisenhower) 행정부는 그의 대통령 당선을 환영했고, 11억 달러나 되는 경제원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오대통령의 정권은 1960년까지 경제성장을 이루어 북부월남의 입지까지 위협하는 듯했습니다.
(반정부 인사들을 처형할 때 사용한 단두대.)
그러나 그의 권위주의 정책은 국민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특히 1955년에 소공멸공(Tố Cộng diệt Cộng) 작전을 시행해서 야당인 국민당(Quốc dân Đảng) 소속을 비롯한 그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어도 체포해서 강제수용소에 보내거나 단두대형에 처했습니다. 북부월남 측의 제네바협약에 따른 공동총선을 거절한 뒤 3월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 이후 10월 20일에 발표한 첫 헌법에서는 명목상으로만 3권분립을 인정하고 실질적으로는 5년 임기 동안 대통령이 행사하는 권한을 강화시켜 그만의 독재정권이 완성되기까지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의 친동생이자 정치고문 겸 근로당(여당) 총비서 오정유(Ngô Đình Nhu)를 필두로 한 천주교 족벌정치가 이루어졌고, 오정염 일가가 믿는 종교인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불교도, 고대교도, 화호불교도 등)까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독재정권을 강화한 오정염 대통령은 무리한 정책을 시도하다 위기에 빠지는데요, 특히 그의 가장 큰 실책으로 지적되는 토지개혁 실패는 토지소유를 100헥타르까지 규정하고 초과분은 정부가 사들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들인 토지는 소작인, 상이군인, 피난민 등에게 6년 상환으로 분배한다고 했으나, 수용한 토지가 너무 적어 분배된 토지는 너무 적고 대지주들의 토지만 유지된 꼴이 됐습니다. 결국 전국 90%의 농민 중 소작농들이 이에 불만을 사고 북부월남에 가담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북부월남에 가담한 남부민들은 무장활동을 전개해 동포들을 사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때문에 1960년 11월 11일 공군 대좌 응우옌 짜잉 티(Nguyễn Chánh Thi)가 우파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 비행기를 이끌고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Dinh Độc Lập)을 폭격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고위장성들의 비협조(당시 응우옌 반 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 훗날 월남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 육군 중좌가 진압작전 참여)로 실패한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오정염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쌓이는데도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반공을 명분으로 오정염 정권을 두둔했습니다.
또 오정염 정권의 반대파 탄압을 피해 활동하던 남부의 공산주의자들은 같은 해 12월 20일 북부월남과는 독자적인 공산주의 무장활동을 전개했는데요, 이들이 바로 월남전쟁 발발 당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베트콩(Việt Cộng)입니다. 이들은 "미제국주의자들과 오정염 정권의 타도 그리고 민족해방"을 기치로 내걸어 낮에는 농민으로 변장하고 밤에는 파괴작전을 감행해 오정염 정권의 골치를 썩였습니다. 이 때문에 1961년 1월 20일 새로 취임한 미국 케네디(Kenedy)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보다 더 많은 군사원조를 보냈습니다. 1962년 봄에는 농민을 베트콩으로부터 분리하는 전략촌(Ấp Chiến lược) 계획이 시행되었으나, 월남인들의 향토정서를 무시하고 강제이주를 시킨 점 때문에 국민들의 원성만 샀고, 그 문제점은 1963년 1월 2일 업박(Ấp Bắc) 전투에서 정부군이 베트콩에게 패배함으로써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때문에 미의회 원로원의원 마이크 맨스필드(Mike Mansfield)를 필두로 케네디 행정부 내에서도 오정염 정권에 의한 회의론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오정염 대통령의 독재정책은 그칠 줄 몰랐고, 1963년 5월 8일 석가탄신일 기념으로 일으킨 불교도들의 데모를 유혈로 진압하자, 당시 천모사(Chùa Thiên Mụ)의 주지승 틱 꽝 득(Thích Quảng Đức)은 이에 항의하여 6월 11일 월남공화국의 수도 사이공(Sài Gòn)시내에서 소신공양했고, 이 모습이 전 세계로 전달되어 오정염 대통령의 독재정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불교계 지도자들이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비교적으로요, 기껏해야 중놈 한 명을 바비큐로 만든 것밖에 없던데요, 마취를 시켜놓고요, 믿음을 이용한 거죠. 심지어 수입산 휘발유를 썼으니 자주적으로 바비큐를 만든 것도 아니었죠.(What have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whom they have intoxicated, whom they have abused the confidence. Even that barbecuing was done not even with self-sufficient means because they used imported gasoline.) - 틱 꽝 득의 소신공양에 대한 오정유의 부인의 반응.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오정유는 친형 오정염 대통령의 정권을 유지하고자 북부월남의 호지명(Hồ Chí Minh) 주석에게까지 손을 내밀었지만, 그것 만으로 70만 사이공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으며, 오히려 케네디 행정부마저 오씨 형제의 정권에 손을 떼게 했습니다.
그해 9월, 케네디 대통령의 오정염 대통령 비난 성명과 함께 각종 대월제재가 이어졌고, 1963년 11월 1일, 오정염 대통령이 월남국 수상시절 폭력조직 빙쑤옌부대(Bộ đội Bình Xuyên)의 소탕을 맡으면서부터 신임했던 즈엉 반 밍(Dương Văn Minh, 훗날 남부월남 말대 대통령) 중장이 불교도 탄압을 이유로 (미국의 사주를 받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오정염 정권은 붕괴하였고, 오정염, 오정유 형제는 군부에 사살되고, 밍 중장을 주석으로 하는 군인혁명회의(Hội đồng Quân nhân Cách mạng)의 발족으로 군부시기(Thời kỳ quân quản)가 열리며 월남 제1공화국(Đệ Nhất Cộng hòa Việt Nam)은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ㅊㅊ
ㄱㅅ
ㅊㅊ
ㄱㅅ
ㅊㅊ
🙏🙏🙏
오 자기전에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월남전쟁 전체를 다루긴 힘들 것 같고, 대신 월남공화국 20년사 3부작을 동아리에 올리겠습니다ㅎㅎ
네^^
외교관은 차이가 있었겠지만 오정염 대통령은 전반적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오버랲되는 부분이 많군요
오정염 대통령은 대미의존보다는 자주국방을 실현하려 하였죠
저도 그게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강력한 권위주의 정책이나 반공정책, 토지개혁 시도는 이승만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베트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는데 덕분에 쏠쏠한 지식 많이 얻어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