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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중세사> 후반 14강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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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14강 1차시

  1. 국호의 선택과정과 천도지 선정과정을 각각 설명할 수 있다.

<고려’ 국호의 유지>

-태조 즉위교서: 국호를 그대로 ‘고려’로 쓰기로 함

-1392년 8월 명에 보내진 조림 사절의 외교문서에 이성계의 직함을 국 왕 대신에 권지고려국사로 표기함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쓴 이유 : 급격한 변혁에서 초래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불안정 대비 : 고려 왕조에 대한 정통성과 향수에 대한 부담감

<국호의 조선으로의 변경>

-조림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명 예부의 자문에 국호 개정에 대한 내용이 있어 국호 제정 논의

<국호의 선택과정>

-명 예부 자문을 받고 국호 개정 논의: 기로백관, 도당에 모아 새 국호 논의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관련 사료] -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奏達)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裁可)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태조실록』 권2, 태조 1년 11월 29일 병오 1번째 기사]

※화령: 1369년(공민왕 18) 화주목(和州牧)에서 개칭된 지역명으로 이성계 의 출생지이자 외할아버지의 고향인 이유로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화령은 1393년(태조 2)에 다시 영흥(永興)으로 바뀜

 

[관련 사료] - 동이(東夷)의 국호(國號)에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 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1번째 기사]

※ 조선: 단군, 기자, 위만

※ 서긍, 『고려도경』, 기자의 교화, 화풍, 당대 중국 황제의 은혜

-1392년 11월 한상질을 보내 두 국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주기를 요청

-명 태조 ‘조선’ 지정, 1393년 2월 한상질 예부의 자문(외교문서)가지고 귀국

-1393년 2월 15일,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함      

-국호를 둘러싼 조선의 외교정책 : 실리를 위한 명분 제공

-국호의 선택까지 명에 의뢰한 데는 공민왕 사후 경색된 양국관계와 왕조교체에 따른 어려움을 풀기 위해 명과의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 해 야 하는 필요성에 따른 것

-1393년 2월 15일 새 왕조의 국호가 ‘조선(朝鮮)’으로 결정

<조선의 의미>

-『동국여지승람』 : “해가 일찍 뜨는 동방의 나라”라는 의미

-최남선 : “땅이 동방에 있어 날 샐 때 햇볕이 맨 먼저 쬐이는 곳”

-청구(靑丘), 진단(震檀): ‘동방의 땅’ 혹은 ‘동방의 나라’라는 뜻

<태조의 천도 의지>

-개성은 고려의 뿌리가 깊이 박혀있는 곳으로 새 국가의 면모와 인심을 일신할 새 도읍의 건설이 필요했음

-즉위 26일 만인 8월 13일에 도평의사사에 ‘한양漢陽’으로 천도할 것을 명령

-1393년(태조 2) 정월 태조가 친히 공주 계룡산의 형세를 보기 위해 출발

-천도가 바로 추진되지 않았는데 개성에 자리잡은 중신들이 천도의 의지가 약했던 것으로 이해

<천도지 선정 과정(1)>

-1393년 2월 계룡산에 도착하여 신도의 산수를 살피고, 조운교통의 편부, 종묘사직궁전시장이 들어설 자리 측량

-김주, 박영충, 최칠석에게 신도 건설 감독 → 공주 계룡산 신도 역사 시작

-1393년 12월 경기좌우도도관찰사 하윤의 상언에 따라 신도 역사 혁파 : 풍수지리상 천도하기에 마땅치 않은 지역

<천도지 선정 과정(2)>

-다음 천도예정지로 무악毋岳 선정 → 풍수지리를 이유로 결정짓지 못함

-다시 의논을 명하였으나, 의견이 분분하고 천도를 바라지 않는 경향

-태조가 남경(한양)의 지세를 살피고 왕사 자초(무학)에게 자문을 구한 뒤 재상들에게 의논케 하니 적합한 지역으로 결정 → 한양으로 도읍 결정

14강 2차시

  1. 고려와 조선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설명할 수 있다.

<사회적 특성(지배층)>

-고려 : (신라와 비교하여 개인의 능력을 중시했지만) : 가문 중시, 귀족화된 관료 중심의 사회 (호족-문벌귀족-무신-권문세족-신진사대부)

-조선 : (고려와 비교하여) 개인의 능력 중시, 양반 중심의 사회

⇒ 고려~조선: 문무양반사회 동일, 세력교체(권문세족→신진사대부)

※ 가장 중요한 것은 왕조의 교체(역상혁명으로 표현된 그 의미 파악)

<통치제도(1)>

-공통점

1) 서경(署經)과 간쟁을 운영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견제

2) 행정 실무가 6조 체제로 운영

3) 합좌기구 존재: 고려-도병마사(도평의사사), 조선-의정부

-차이점 : (전체적으로 보면) 고려에 비해 조선 왕조의 왕권이 더 강화 : 왕권뿐만 아니라 신권 또한 신장되었음

<통치제도(2)>

고려

조선

도병마사 → 도평의사사

의정부 → 비변사

6부(이·병·호·형·예·공)

6조(이·호·예·병·형·공)

국왕 관련 업무: 중추원

국왕 관련 업무: 승정원

백관 감찰, 탄핵: 어사대

백관 감찰, 탄핵: 사헌부

국왕, 봉박, 서경: 중서문하성 낭사 어사대+낭사=대간: 청요직

국왕에 대한 봉박, 서경: 사간원

삼사(재정·회계 기관)

삼사(언론·학술 관청)

지방장관(각 도 장관): 안찰사

지방장관(각 도 장관): 관찰사

 

<지방행정제도>

-공통점

1) 지방관 파견을 통한 중앙집권화

2) 지방 세력 통제책 : 고려-사심관·기인, 조선-유향소·경재소

-차이점

 

고려

조선

행정구역

5도(행정) 양계(군사)의 이원체제

전국을 8도로 일원화

지방관

파견 여부에 따라 주현과 속현

모든 군현에 지방관 파견

향리

지방 향리세력 강성

지방 아전 전락

특수행정구역

향·소·부곡의 존재

향·소·부곡 소멸 → 면·리 제도 정착

지방 통제

지방연고 고관 지방 통치: 사심관

유향소

 

<관리임용제도>

-공통점

: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와 문음의 혜택을 받는 음서제 병용

-차이점:제도의 운영에서 차이를 보임

1) 조선시대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로 나눠 실시

고려시대 무과는 말기(공양왕) 시작

2) 조선시대 승려를 선발하는 승과 폐지 → 억불정책

3) 음서제도  

:고려- 5품이상 관리의 자손(양측적 혜택), 고위 관직 진출 용이

조선- 2품이상으로 제한, 한 사람의 자손에게만 혜택, 고위 관직 진출 제한

<토지제도>

-고려 : 전시과- 문무관료, 직역 부담자에 대한 수조지 분급을 규정한 토지 제도. 곡물을 재배하는 전지와 땔나무를 공급해주는 시지를 아울러 분급

-조선 : 과전법- 경기도에 있는 토지로 한정하여 관리들에게 수조권 지급 → 직전법(현직 관료) → 녹봉만 지급. 수조권 제도 폐지

<사상문화>

-고려: 불교 중심의 사회이나 도교나 풍수지리사상 등 다른 종교와 이념도 폭넓게 수용 ⇒ 사상의 다양성

-조선: 유교(성리학) 중심의 사상의 폐쇄성, 숭유억불정책 ⇒ 사상의 획일성, 주자성리학 이와 이단시, 사문난적

 

 

14강 3차시

  1. 고려왕조가 갖는 역사적 위상을 삼한일통과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다.

<고대 문화의 극복:중세사회의 성격>

-지방 호족이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며 신라의 진골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를 개혁하면서 새로운 문벌 귀족 사회 형성

-유교적 정치 질서를 중시하여 신라 정치제도보다 진전하여 행정적 기능이 중시되고 교육, 과거 제도가 정비됨

-중세 문화 발달: 혈족적·종교적 성격을 탈피하여 고대 문화의 모순을 극복

-당·송의 중국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특성을 발전

-지방호족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참여하면서 지방문화의 성격이 보다 뚜렷

<민족의 재통일>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 의미

-북진 정책과 북방 민족과의 항쟁 등을 통해 자주적 통일

-다양한 종교와 사상의 수용: 후삼국을 통합한 후 옛 고구려, 백제, 나아가 발해의 인적·물적 자원을 흡수하여 새로운 민족 문화 발전

 

<삼한일통의식>

-국호: ‘고려高麗’

-고구려의 넓은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구토회복 의식’

-건국자 왕건 본인이 고구려 후예 자처

-서경(고구려 수도 평양) 중시

-발해에 대한 친척의식, 발해 유민의 포용

 

<삼한일통형성>

-‘삼한’이라는 민족체의 동질성 + ‘일통’의 당위성을 인식

-사회 갈등이 심화된 신라말 강화 → 민족 내 대립 극복과 평화에 대한 기대

-고구려 계승 이념을 표방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할 이념적 당위성으로 내세움

-통일신라의 ‘일국삼통一國三通’ 의식 활용

-다원적 요소, 층위 서로 대립·경쟁, 의식과 제도로 공존, 소통·교류하는 사회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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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정
    작성자
    2021.12.17
    @ 님에게 보내는 답글

    다 끝났는데 만약 시험에서

    고려와 조선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쓰시오!!

    하면 맨붕 올 것 같은데 ㅋㅋㅋ

  • 김세정
    유가영
    2021.12.17
    @김세정 님에게 보내는 답글

    엥 그게 젤 쉬운문제 아닐까 ㅋㅋㅋ

  • 유가영
    김세정
    작성자
    2021.12.17
    @유가영 님에게 보내는 답글

    뭐라고 하지?

  • 김세정
    유가영
    2021.12.17
    @김세정 님에게 보내는 답글

    차이점은 위에 잘 정리되어 있네. 저기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거 골라서 써

    불교국가와 유교국가의 차이라든지 조선시대와서 음서폐지한거라든지 도읍천도한거라든지 ㅇㅇ

    공통점은 한민족의 통일국가였고 왕권국가였고 이런거 ㅇㅇ

    위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저기서 중요하다 생각하는거 골라서 잘 기억해둬

  • 유가영
    김세정
    작성자
    2021.12.17
    @유가영 님에게 보내는 답글

    오 댕큐!!

  • 유가영
    2021.12.17

    저때 조선이 진짜 조선..

  • 썩킴
    2021.12.17

    고려 경제 개토나온다 전지 시지 진짜 만든 놈 후드려패야함

  • 썩킴
    김세정
    작성자
    2021.12.17
    @썩킴 님에게 보내는 답글

    ㅋㅋㅋ

  • 완혜

    나중에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2세가 급작스럽게 붕어할 때 태자 찰스가 왕위를 대행(?)하면 언론에서 권지영국국왕사로 소개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