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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중세사> 후반 13강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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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13강 1차시

  1. 이성계의 집권과정을 역사적 순서에 맞추어 설명할 수 있다.

-최영: 고봉현(고양)으로 귀양, 이후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참형

-우왕을 강화도로 쫓아내고, 33대 국왕 창왕 9세의 나이로 즉위(1388.06) : 이색 중심의 온건개혁파 ↔ 정도전 중심 급진개혁파 : 왕위계승문제와 사전개혁문제를 둘러싼 갈등 격화

-조민수와 이성계의 대립: 우왕의 후사 문제로 의견 대립(종실 vs 창) → 창왕 즉위 → 사전개혁문제로 반대파 조민수 제거(창녕으로 귀향)

-수시중과 도총중외제군사를 겸하여 군권 장악하면서 집권자의 길로 들어섬

※ 정치+인사+병권 장악

13강 2차시

  1. 공양왕의 선위와 이성계의 즉위과정에 영향을 미친 정몽주 제거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공양왕의 선위>

-정몽주 제거 이후, 왕조교체를 반대했던 이색을 비롯한 이숭인조호김진양 이무, 우현보와 그 당여 및 종실 남평군 화가연군 규 등 20여 명을 유배

-공양왕은 1392년 7월 밀직제학 이방원과 사예 조용을 불러 동맹의 형식 으로 이성계에 의지하여 고려왕조 유지를 요구

-이성계파 우시중 배극렴이 폐위상소를 올려, 공민왕비인 정비의 교를 받는 형식으로 공양왕을 폐위하여 원주로 방축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개경 수창궁에서 새 국왕으로 즉위

-이로써 34대 475년에 걸친 고려왕조의 종언

<정몽주 제거 과정>

-1392년(공양왕 4) 3월 명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을 맞이하러 갔던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중상을 입음

-4월 정몽주는 간관 김진양 등을 통해 조준정도전남은윤소종남재 등을 탄핵하여 유배보내고 장차 이성계를 도모하고자 함

-이성계가 급거 개경으로 돌아오고, 정몽주는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문병을 구실삼아 이성계의 집 방문

-이방원과 정몽주의 하여가단심가 일화 → 정몽주의 거절

-이방원이 조영규 등을 시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피살

 

13강 3차시

  1. 태조 이성계의 즉위 이후 개혁정치 사례를 1가지 이상 설명할 수 있다.

 

<즉위 후 개혁정치:1392년 7월 28일 전면적인 통치조직 반포>

1. 태조가 문하찬성사 윤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2. 태조가 4대 조상에게 칭호를 내렸다.

3. 조선 제1대 왕에 오르며 즉위교서를 반포하다.

4.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비하다.

5. 정도전, 조준, 배극렴 등에게 관직을 내리다.

<즉위 후 개혁정치 : 1392년 7월 28일 전면적인 통치조직 반포>

-문무백관의 제도 정비 - 관직제도는 대체로 고려의 제도를 따랐으나 명칭과 내용은 필요에 따라 조정

-문반의 핵심이 되는 정치기구 : 도평의사사

-도평의사사: 합좌기관으로 문하부, 삼사, 중추원의 2품 이상으로 구성, 29명 : 문하부=신하의 업무, 삼사三司=재정업무, 중추원=보고, 지시 : 실무=6조 - 문무반의 산계를 각각 18품계, 12품계로 정하고 명칭도 새롭게 개정

 

<새 왕조 개창과 대명관계>

-명이 새 왕조와 이성계의 즉위를 인정하느냐의 여부가 중요

-즉위한 다음날인 7월 18일 도평의사사와 대소신료한량기로 등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반越胖을 명에 보내 역성혁명의 불가피성과 이성계 추대사실 알림 - 8월 29일 조림趙琳을 명에 보내 이성계의 즉위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함

-조반, 조림 모두 새 왕조의 개창과 이성계 추대 사실을 명으로부터 인정받고 귀국함

 

<유교의 정치이념화>

-고려시대 불교는 왕실과 귀족의 보호와 장려를 받아 융성 → 고려 후기 불교와 관련한 재정악화, 군사력 약화 등의 여러 폐단 초래 - 13세기 말 원으로부터 신유학인 주자학이 전래 → 주자학을 학습한 신진관료 진출

-유학자들은 점차 불교사원의 폐단과 승려들의 비행을 공격하기 시작 → 척불운동

-고려 말 신진관료들은 주자학을 학습하였고 불교를 배척하며 구사회구질서 를 부정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 → 조선왕조 개국

-1392년 이성계의 즉위교서: 유교사회, 유교정치 지향을 표명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 추대 유학자 관료들의 유교정치 실현을 위한 노력

 

<경제기반: 과전법 체제>

- 고려 후기 권문세족과 사원이 토지를 점거하고 농장 설치 → 국가 수조지인 공전 감소, 국가재정 고갈 등 → 새로 진출한 관료들에게 줄 토지, 녹봉, 군자도 부족한 상황

- 고려 말 전제개혁문제는 토지를 광점한 권문세족 및 사원과 이해관계가 상충 - 1388년(창왕 즉위) 7월 조준의 사전개혁에 대한 상소를 시작으로 이성계 일 파의 전제개혁 단행

–사전개혁에 반대하는 반대파를 탄핵, 유배 등으로 제거하고 전제개혁 추진

-1391년(공양왕 3) 5월 과전법 실시 → 이성계 일파의 경제적 기반 확립

 

<외교정책:대명 사대관계>

-1368년(공민왕 17)부터 시작된 명과의 관계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 이후 확립된 대명정책의 틀이 조선에 그대로 계승 - 명 수립 이후 고려와 책봉관계 수립 →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재편되는 과정

-원을 타도하고 배척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양국 간 우호적인 관계 성립

-명이 요동의 원 잔여세력을 몰아내고 요동을 경략하는 과정에서 대립 시작

-명의 요동진출에 대한 고려의 군사적 대응으로 최영이 요동정벌 단행

-이성계와 조민수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고려 정국 일변 : 우왕 폐위, 창왕 옹립, 최영 유배 등 → 이성계에 의해 공양왕이 옹립, 명의 철령위 설치 시도 → 조선왕조 개창의 한 단서 제공

-명과의 우호적인 관계 정립을 위한 노력 : 국호 문제 등 → 국내 왕권 확립과 신왕조의 정통성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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