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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바위와 중종반정

도란의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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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드라마 대장금에서 매번 '맛이 좋구나' 만 연신 외치던 이 아저씨는 조선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왕이 된 중종이다. 드라마에서는 그저 음식만 맛있게 먹을줄 알았던 이 아저씨에게는 나름대로의 슬픈 사연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 '단경왕후 신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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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단경왕후 신씨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집안의 딸이었던 인물이다. 할아버지 신승선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사위이자 연산군의 장인이었으며, 아버지 신수근은 좌의정에다 연산군의 처남이었고 연산군의 정비인 폐비 신씨였다. 그녀는 13살의 나이로 연산군 5년(1499년),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에게 시집을 갔으니 이가 바로 훗날 먹보라 쓰고 중종이라고 읽는 그분이였다.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는 연산군이 자신의 친아들을 해칠것을 염려하여 안전장치로 신씨와 혼인시켰던것 같다. 그녀의 아버지가 연산군이 신뢰했던 신하 신수근이였기에..(영조실록과 국조인물고에는 연산군에게 간언하지않고 신의를 지키는 강직한 인물로 묘사됨.)

 

중종반정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게 7년을 살았다고 한다. 신씨가 총명하고 온화하여 진성대군이 연산군의 눈에 띄지 않게 잘 보필했으며 진성대군 또한 그러한 신씨를 믿고 따랐다. 사실 진성대군은 매우 겁이많고 소심하고 나약한 인물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인 이야기<부계기문>에 이르면 연산군이 어느날 진성대군과 말 달리기 시합을 제안했다. 사냥터에서 궁궐까지 누가 먼저 도착하는가의 시합이였고 만일 여기서 진성대군을 벌하겠다고 말했다. 연산군은 준마를 타고 있었고 진성대군은 아니였다. 연산군이 진성대군을 죽이기로 작정했던것이였다. 진성대군은 이것을 매우 두려워했는데 그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진성대군을 불쌍히 여긴 한 신하가 진성대군을 태우고 달려서 연산군보다 빨리 궁궐에 도착해 죽음을 면했다는 얘기다. 또한 다른 이야기는 어느날 반정세력의 병사들이 진성대군의 집을 호위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자신을 죽이기 위해 연산군이 보낸 병사들이라고 착각한 진성대군은 겁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러자 부인 신씨가 나서서 진성대군에게 이르기를 

 

"저들이 우리를 잡으러 왔다면 말머리가 우리집을 향해 있을것이고, 우리를 지키러 왔다면 말꼬리가 우리집을 향해 있을것입니다."

 

라면서 이를 확인케 하여 안심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연려실기술>에 실려있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부인 덕분에 진성대군은 왕위에 올라 먹방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불행의 시작

 

이렇게 그녀의 삶이 왕을 만든 총명한 왕비로 행복하게 끝났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신수근은 영조실록과 국조인물고에는 신의를 지키고 강직한 사람으로 남겨져 있다. 1506년 좌의정에 있을때 박원종 등이 장차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뜻을 품고 진성대군의 장인인 그에게 누이와 딸 중 선택하라고 하자 신수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신의를 저버릴수 없고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겠다고 말하자 박원종일당이 그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판단하여 중종반정이 시작되자 신윤무, 이심등을 보내어 수각교에서 신수근을 살해하였다. 그의 동생이였던 신수겸과 신수영도 이 때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야말로 그녀의 친가가 개박살 난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였던 중종을 사랑한 그녀는 중종곁에 남았으나 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폐비로 전락

 

부인 덕에 왕이된 중종을 따라 부인 신씨도 일단은 궁궐에 따라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반정공신들이 말하기를

 

"거사할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일을 성취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친딸이 대내(大內)에 있으니 만약 궁곤(宮壼)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사에 관계됨이 있으니, 은정(恩情)을 끊어 내치소서."

 

말하니 먹보왕 말하기를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나,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리오?" 

 

그러나 반정공신들은 신씨가 아이를 낳으면 자신들에게 해를 가할까봐 두려워 그녀를 궁밖으로 내쫓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종역시도 아내를 내치지 않으려고 버텼으나 끝내 입궁한지 7일만에 궁밖으로 내쳐졌다.

 

복위거론

 

신씨가 쫓겨나고 장경왕후가 세자(훗날 인종)을 낳은 후 사망하자 중종10년(1515)년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청 등이 "신씨를 복위 시켜야 한다"는 상소문을 중종에 올리며 일부 대신들이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주장이 잠시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중종이 이것을 반대했다. 

(아주 먹방밖에 모르는 야발놈이 아닐수가 없어.)

이때 복위 가능성이 있었던게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유자광같은 반정공신들이 모두 공자랑 조우한 상태라서 중종이 의지만 있었다면 다시 복위가능성이 있었지만 만일 신씨가 복위했을때 아들을 낳게된다면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에게서 얻은 아들을 적장자로 봐야하느냐, 아니면 정식 왕후인 윤씨가 낳은 중중의 첫번째 적장자로 봐야하느냐는 논란이 있을까봐가 이유였다.

(뭔 야발 개 뼉다구 같은 소리를 길게도 설명했네)

그리고 나서 14년 뒤인 중종 24년에 다시 김식이라는 사람이 중종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신씨를 폐위 시킨 죄목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얼룩소의 새끼라도 빛깔이 붉고 뿔이 똑바로 났으면 버리지 않는다고 햇는데, 신씨의 덕은 얼룩소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내 속이 다 시원하네.)

 

중종도 아마 속이 쓰렸는지 평상시라면 처벌하려했으나 극대노하면서도 참았다.(솔직히 맞는말했지. 원래 맞는말이 더 화나는법.홍카콜라말에 극대노하는 정치인들 마냥.)

이후에 신하들이 김식을 처벌하기를 주장했으나 중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지가 양심있으면 함부로 처벌하기 어렵지.)

 

그렇게 결국 단경왕후 신씨의 생전에 복위는 하지 못하고 결국 중종이 죽은지 13년이 지나 명종 12년에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녀의 인생사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과 명종이 단경왕후를 자주 챙겨줬다는 기록들도 있다.

 

복위

 

그녀의 죽음이후에도 계속 폐비 신씨(연산군의 정비도 폐비 신씨-그녀의 고모)로 불리다가 182년이 지난 영조 15년, 유생 김태남은 영조에게 신씨를 복위 시킬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영조는 김태남의 상소가 올라오기전 이미 신씨 복위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으나, 몇몇 신하들이 

 

"처음부터 책봉하지 않았고 사제(私第)에 나가 있었으니 복위를 논하기 어렵다" 

 

라고 의견을 내자 영조는 다시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태남이 상소를 올리자 영조는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을 복권 시키고 영의정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으로 추대하고 또한 신씨를 마침내 182년만에 단경왕후로 복위시켰다.

아마도 영조는 신수근의 충성심과 단경왕후의 이야기에 감동받았는지 정몽주와 비교할 정도였다.

(사실 나도 좀 안타깝기도하고 그래서 귀찮음을 무릎쓰고 장문을 쓰고있다

 

치마바위

 

여기서부터는 야사에 실린 이야기이다. 신씨가 궁궐 밖으로 나가자 부인에게 크게 의지했던 중종은 날마다 경회루에 올라가 신씨의 거처가 있는 인왕산쪽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그런사람이 장경왕후랑은 금술이 나쁘지 않았다. 아주 야발놈이 아닐수가 없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씨는 매일 인왕산에 올라 단홍치마를 바위 위에 펼쳐 놓고 한없이 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치마를 올려놓은 그 바위가 치마바위. 또한 중종이 승하하기 전 한 여인이 은밀히 궁으로 들어갔는데, 그 여인이 폐비 신씨라는 소문이 들렸으나 사관에 의하면 중종의 쾌유를 빌기위해 궁에 들어온 여승이었다고 한다.

 

결론: 중종 슬픈척하는 야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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