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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성 총진 좌군 여문열

완혜 청꿈실세

청년의꿈 회원 여러분은 월남의 민족 영웅 하면 대게 광중제(Vua Quang Trung)나 진흥도(Trần Hưng Đạo) 장군을 생각하실 텐데요,

 

제가 오늘 다룰 월남의 민족 영웅은 바로 가정성 총진 여문열 장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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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열(Lê Văn Duyệt / 黎文悅, ? ~ 1832)

 

여문열 장군은 월남 완조의 장수로, 전군 완문성(Nguyễn Văn Thành / 阮文誠), 우군 완황덕(Nguyễn Huỳnh Đức / 阮黃德), 후군 무성(Võ Tánh / 武性)과 더불어 완조 창건에 일등으로 공을 세운 네 장관(掌管) 중 하나인데요, 이 네 명 중 좌군 여문열이 가장 위상이 높습니다.

 

그는 월남 남부 마을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완씨 정권의 궁정에서 환관으로 일했지만,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발견한 후에는 군관으로 승승장구하고, 승륭(Thăng Long / 昇龍) 공성전에 참전하여 서산(Tây Sơn / 西山) 군대에 맞서는 등 주군인 완복영(Nguyễn Phúc Ánh / 阮福暎)의 월남 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완복영이 황제에 등극하여 완씨 왕조를 창건한 뒤에는 자신의 고향인 남부 지방에서 제일 큰 성인 가정성(현 사이공)의 총진을 맡았는데요, 여기서 그가 월남 남부 지방의 지리와 그 지방 원주민들의 기질을 습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탁월한 행정술을 선보입니다. 그의 통치 하 가정성은 도둑이 없고 물자가 넘쳐나는 평화로운 성이었으며, 크메르족을 비롯한 원주민들의 관습과 프랑스인 천주교도들의 선교, 화교들의 장사도 허용되어, 성내 주민들은 그의 선정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1812년에 당시 월남의 조공국인 캄보디아의 국왕 엉쩐(Ang Chan)이 시암(현 타이)의 사주로 동생 엉음(Ang Em)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군대를 이끌고 캄보디아로 진주하여 엉쩐의 복위를 도와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월남과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캄보디아에서도 여문열 장군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완복영이 붕어한 뒤 차기 황제 명명제(Vua Minh Mạng / 明命帝) 즉위하자, 여문열의 장군의 입지는 위태로워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완복영이 죽기 전 그의 어린 아들 완복경(Nguyễn Phúc Cảnh / 阮福景)을 천거한 것 때문에 명명제의 앙심을 샀고, 또 명명제는 중화사상에 기초한 강경한 중앙집권적 통치로 남부 지방을 다스리려 하였는데요, 이 과정에서 포용적 정책을 실시하는 여문열 장군이 자신의 황권에 위협이 될까봐 항상 그를 견제했습니다. 물론 여문열 장군은 반역의 뜻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총진으로 부임할 동안 명명제에 대한 충성을 부르짖어왔습니다.

 

이후 여문열 장군은 1832년 7월 30일에 서거하고, 가정성의 후임 총진으로 그의 양자 여문회(Lê Văn Khôi / 黎文𠐤) 장군이 부임했습니다. 그러자 명명제는 바로 가정성을 해체시키고, 여씨 일가에 반역죄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여문열 장군의 묘를 평지로 만들고, 여문회 장군을 하옥시켰습니다. 여문회 장군은 이에 반발하여 옥에서 탈출해 평남대원수의 직책에 올라 세력을 규합하여 2년 동안 반란을 일으켰지만, 1835년 9월 중앙조정군에 포위된 와중 전사하고, 그의 휘하에 있던 조제프 마르샹(Joseph Marchad) 신부를 포함한 가정군 생존자들과 그의 식솔들은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여문열과 여문회 부자의 사후 그들이 다스리던 가정성은 해체되어 잔혹한 통치가 시작되었지만, 명명제가 붕어한 뒤 황위에 오른 그의 아들 소치제(Vua Thiệu Trị / 紹治帝)는 여문열 장군을 복권시켜주었고 묘도 다시 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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