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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영천전투와 2차 경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명나라 장수에게 구타당해 죽은 박진(朴晉)장군

ydol7707 정치의원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221027002

박진(朴晉)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25년) 7월 28일 영천 전투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성을 탈환하는데 공헌을 하였고, 2차 경주성 전투 때 지휘를 하며 왜군을 몰아내고 성을 탈환한 업적이 있다. 특히 경주성 전투 당시에 비격진천뢰를 사용한 전투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개전 초기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명나라 장수들에게 두번이나 치욕을 당했는데....

 

첫번째는 1593년 7월 18일에 <선조실록>에 실린 내용을 보면

 

上敎政院曰: "今聞毋遊擊者, 聽沈惟敬之言, 庇護倭賊, 結縛朴晋等四將, 至於棍杖, 極其(繆)〔戮〕 辱, 不勝痛憤。 朴晋等, 雖陪臣, 閫外重任之將, 豈毋遊擊之所擅罰? 此習不除, 將士無以措手足。 可於經略前爲揭帖, 極陳其狀事, 議處。"

 

"지금 듣건대 관유격(毌遊擊)이란 자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朴晉) 등 네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까지 치고 온갖 치욕을 보였다고 하니 통분함을 견딜 수 없다. 박진 등이 비록 배신(陪臣)이기는 하지만 곤외(閫外)의 중임을 맡은 장군인데 어찌 관 유격이 멋대로 벌을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버릇을 고쳐 놓지 않는다면 우리 장사들이 손발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경략에게 게첩(揭帖)을 보내어 그 상황을 자세히 말할 것을 의논해 처리하라."

 

라는 내용이 있는데, 명나라 장수 관유격이 심유경이란 자의 말만 듣고 박진 장군을 곤장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한 내용은 1597년 5월 29에 실린 실록 내용을 보자면

 

敬立又啓: "朴晋之死, 因唐將歐打。 死後視之, 則胸骨折傷云。 死以國事, 比他尤慘矣。 頃者洪季男老母, 命給食物, 中外莫不感激。 朴晋與季男豈異? 其老母在, 宜加恤典。" 上曰: "其老母在乎?" 對曰: "時在積城墓下矣。" 【壬辰之亂, 列郡風靡, 逃竄不暇, 而晋以密陽府使, 獨領孤軍, 欲遏大賊, 其忠誠義氣, 卓越諸將矣。】 上曰: "欲給料乎?" 對曰: "依洪季男例, 給料似當。" 上曰: "令該司議爲。" 申點曰: "朴晋被打唐將, 乃婁承先也。

 

경립이 또 아뢰기를,

"박진(朴晉)의 사망은 중국 장수에게 구타를 당해서입니다. 죽은 뒤에 보니,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합니다.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참혹합니다. 지난번에 홍계남(洪季男)의 노모(老母)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도록 명하자, 중외(中外)가 모두 감격했었습니다. 박진이 홍계남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에게도 노모가 있으니 구휼하는 은전(恩典)이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 노모가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적성(積城)의 무덤 아래에 있습니다."

하였다. 【임진 왜란에 여러 고을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도망쳐 숨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박진은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혼자서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대적을 막으려 하였으니, 그의 충성과 의기는 여러 장수들에 비하여 탁월한 것이었다. 】 상이 이르기를,

"늠료(廩料)를 주려고 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홍계남의 예와 같이 늠료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사로 하여금 의논해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점이 아뢰기를,

"박진을 구타한 중국 장수는 누승선(婁承先)입니다."

하자, 준겸이 아뢰기를,

"박진의 뼈가 부러진 곳을 신도 보았습니다.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신병을 말하지 못하다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이말인 즉슨 위 기사에 따른다면 명나라 장수 누승선이 군량 공급 불만으로 박진 장군을 구타하여 죽음에 이르는 폭행치사죄를 저지른 것이다. 황당하게도 선조는 누승선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 하지 않았고, 명나라 눈치를 보느라 박진 장군을 선무공신에 넣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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