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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이반 4세의 친위대 오프리치니크

YST 청꿈직원

https://blog.naver.com/karajan1976/222900634284

 

우리가 잘 아는 오프리치니크의 대명사. 대니얼님의 블로그에 따르면 보야르 페도로프를 죽일 때 그를 조롱하려고 차르의 옷을 입힌 것이라고 한다.

 

과거의 비밀 경찰 쯤 되지만 가장 악랄했던 이반 4세의 친위대

오프리치니크 (Oprichnina, Опричнина).

우리가 모르는 사실에 대해 알아봅시다.

 

※ 참고로 모든 내용은 러시아 위키백과에서 가져왔고 내가 나무위키에도 내용을 추가해 덧붙였음을 알립니다.

 

(1) 누가 가장 악랄했나?

 

오프리치니크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은 그 잔혹성만 대충 알지 얼마나 잔혹했는지는 모릅니다. 오프리치니크가 살해나 괴롭힘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귀족, 성직자,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럼 이들 중 누가 가장 악랄했을까요?

 

그건 바로 말류타 스쿠라토프(Малюта Скуратов, ? ~ 1573)입니다.

그는 오프리치니크의 대장 격 이었고 같은 오프리치니크를 감독하고 감시하여 벌 주는 역할도 하였답니다.

 

말류타 스쿠라토프와 이반 4세. 서있는 청색 옷의 남자가 스쿠라토프이다.

 

말류타 스쿠라토프의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 수 없으나 이반 4세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거나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방 하급귀족 쯤 된 스쿠라토프-벨스키 가문의 사람으로 그가 죽인 대표적인 인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블라디미르 안드레비치 스타리츠키(1530/1533~1569)

 

이 사람은 이반 4세의 친사촌형제이다. 아버지인 안드레이 왕자가 어린 이반 4세와 모스크바 대공자리를 두고 유력하게 다투기도 했고 결국 그의 아버지가 이반 4세의 어머니인 엘리나 글린스카야에게 숙청당했기에 그는 삶 내내 이반 4세에게 감시를 당해야만 했고 1563년에 이미 큰 반역 사건에 연류되어 겨우 용서를 받았지만 죽을 때 까지 감시를 당하다가 스쿠라토프에 의해 살해되었다. 물론 스쿠라토프가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이반 4세의 지시로 스쿠라토프가 오프리치니크들을 데리고 그를 끌고 가 이반 4세가 그에게 독약을 먹고 죽게 했으니 사실상 1번째로 스쿠라토프가 죽인 사람.

 

2. 모스크바 총대주교 필립(1507~1569)

 

러시아의 총대주교 자리가 들어서기 전 까지 러시아 최고위 성직자였던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된 사람. 오프리치니크의 창설을 젬스키 소보로에서 대놓고 반대하며 이반 4세에게 맞섰는데 당시 이반 4세는 필립에게 닥치라는 험한 말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처참하게 쫒겨나 일개 수도사로 밀려났는데 스쿠라토프는 이반 4세의 명령으로 그가 추방 된 트베리의 오트로흐 승천 수도원으로 가 그를 조롱하며 배게로 목졸라 죽였는데 그는 태연하게 "너희가 불을 과하게 때서 방이 너무 뜨거워 죄인 필립이 죽지 않았느냐!" 면서 그 곳의 수도원장을 비난했고 장례식을 급히 치룬뒤 서서히 떠났다.

 

총대주교 필립을 죽이기전 그를 조롱하는 말류타 스쿠라토프의 모습.

 

3. 노보고로드 대주교 피멘(?~1571)

 

이 사람은 이반 4세의 측근이었다. 그는 때로는 이반 4세의 명령으로 성당이나 수도원을 건립하기도 하고 이반 4세의 껄끄러운 외교적인 문제에서는 고위성직자로써 나서 대신 해결해주기도 하였다. 오프리치니크의 창설에 찬성했고 무엇보다도 총대주교 필립을 고발해 재판정에 세우고 모스크바 총대주교 자리에서 끌어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런 그도 노보고로드 대학살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이었던 지기스문트 2세와 내통했다는 죄를 뒤집어 써 수도사로 강등당했고. 일설에는 그냥 죽었다는 기록과 달리 오프리치니크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 두 설이 있는데 오프리치니크의 대장 격이 스쿠라토프였으니 그의 숙청에 스쿠라토프가 깊숙히 관여되어 있을 것이다. 더욱 웃긴 것은 피멘의 뒤를 이어 노보고로드 대주교가 된 레오니드도 똑같이 후에 이반 4세에게 반역죄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오프리치니크가 해체되자 1573년에 리보니아 전쟁에 총독으로 투입되어 공성전을 벌이다 리보니아 파이데(현재의 에스토니아)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반 4세는 스쿠라토프를 아껴 그의 사후에도 그 친족들을 잘 봐주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오프리치니크의 숙청대상이 물론 이반 4세의 명령이긴 했으나 같은편이나 적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2) 오프리치니크 자신들은 안전했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오프리치니크였던 표도르 알렉세비치 바스마노프(Fyodor Alekseevich Basmanov)는 같은 오프리치니크였으면서 자신의 아버지인 알렉세이가 반역의 누명을 쓰자 그 스스로가 아버지를 죽였으나 그 또한 연좌죄로 이반 4세에게 죽임을 당했고.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비아젬스키(Afanasy Ivanovich Vyazemsky)의 경우에는 노보고로드에서 피멘을 비롯한 다른 귀족들과 함께 내통했다는 이유로 함께 동료들에게 살해당했으니 오프리치니크에게서 안전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3) 오프리치니크 출신 중 유명한 인물과 이후.

 

후에 차르가 되는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udnov). 고두노프와 함께 이반 4세를 말년까지 모셨던 보그단 벨스키(Bogdan Yakovlevich Belsky)가 있는데 고두노프는 말류타 스쿠라토프의 사위이고, 보그단 벨스키는 스쿠라토프의 친조카였으니 혈연으로 이어져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반 4세가 그 둘을 말년에 곁에 둔 이유는 오프리치니크 출신임과 동시에 스쿠라토프의 친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프리치니크들 중 이반 4세에 의해 오프리치니크의 활동 시기 당시에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고 오프리치니크의 해산 이후에 숙청당한 경우도 있지만 위의 고두노프나 벨스키의 경우처럼 끝까지 살아남은 경우가 매우 많고 많은 오프리치니크들이 해산 이후 지방의 총독이나 장군으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출신이 출신인지라 잔혹성은 어디가지 않았기에 고두노프는 섭정기 내내 반대파를 숙청하기도 하고 보그단 벨스키는 표도르 1세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고 말년에 카잔의 총독이 되었지만 폭정을 일삼아 그곳 주민들에게 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오프리치니크를 보면 이반 4세의 양면성을 너무나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크를 시켜 반대파도 그리고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도 무차별적으로 살해를 하였고 또한 오프리치니크들 중에서도 숙청을 면치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오프리치니크들은 그런 상황속에서 이반 4세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더 악랄하게 행동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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