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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91세로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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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맹이 청꿈직원

https://n.news.naver.com/article/014/0004890986?sid=104

 

 

미하일 고르바초프(오른쪽)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2011년 3월 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로열앨버트홀에서 열린 80세 생일잔치(산수연)를 위해 딸 이리나 비르간스카야(왼쪽)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이마 위 정수리 부근의 붉은 색은 점이다. AFP연합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르바초프는 옛 소련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펼쳐 동서 냉전을 끝낸 인물이다.  

1985~1991년 옛 소련 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다.  

 

 

병환으로 별세

 

CNN 등 외신은 러시아 국영 RIA 노보스티 통신 보도를 인용해 고르바초프가 오래도록 심각한 질병을 앓았다면서 결국 별세했다고 전했다.  

RIA노보스티 통신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오늘 밤 심각한 중증 질환으로 (중앙의료원에서)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고르바초프는 재임 시절 옛 소련의 정치·경제 개혁을 도입했고, 냉전을 끝낸 인물이다.  

특히 그는 이오시프 레닌 등 공포정치를 펼쳤던 이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소련 지도자들과는 다른 리더십을 보여줬다.  

대중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차가운 이미지가 고착된 이전 소련 지도자들과 달리 그는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갔다.  

권위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그는 서기장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대대적인 개혁 정책 군불을 땠다. 미국 등의 자본주의 체제와 경쟁에서 공산주의 계획경제 체제가 패배했다고 결론 지은 그는 소련 제도와 경제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정치 제도는 더 민주적으로 만들기 위해 개혁에 나섰다.  

고르바초프는 후에 "이 개혁들을 시작한 뒤 나를 이끈 표지는 유혈사태 없는 자유와 민주였다"면서 "더 이상 목동(공산당)이 대중을 이끄는 것을 멈추고, 대중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시민이 되도록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시골 농민의 아들에서 서기장으로

 

고프바초프는 1931년 3월 2일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사이 러시아 남동부 지역 스타브로폴에서 농사 일을 하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려서 공부와 농사를 병행했다.  

부친은 작물을 수확하는 컴바인 기사였다.  

고르바초프는 후일담으로 자신이 소리만 들어도 컴바인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척척 알아맞히는 재주가 있어 자랑스러웠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그는 1952년 공산당원이 됐고, 3년 뒤인 1955년 모스크바대 법대를 졸업했다.  

고르바초프는 재학시절 동문이던 라이사 티타렌코를 만나 뒤에 결혼에 골인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고향인 스타브로폴 지역의 농업부서 책임자가 됐고, 1960년대 말에는 지역 공산당내 최고 간부로 직위가 올라갔다.  

그는 이 때 당시 소련 공산당 정책결정 기구였던 정치국(폴리트뷰로) 국원이었던 미하일 수슬로프와 훗날 서기장이 되는 유리 안드로포프의 눈에 들었다.  

이들의 후광을 업고 고르바초프는 1971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1978년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로 복귀했고, 이듬해 정치국원 후보로 선정됐다.  

그러나 그가 맡았던 소련 농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역시 깨달았지만 집단체제는 여러 방면에서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가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다.

 

1980년 정식 정치국원이 된 그는 1982년 그의 멘토 안드로포프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에 이어 공산당 서기장이 되자 영향력이 더 커졌다. 그는 부패와 비효율 척결로 명성을 쌓았고, 마침내 1985년 3월 소련 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했다.  

 

 

군비경쟁 종식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의 민간 부문으로 자원을 돌리기 위해 서방과 군비경쟁을 종식하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늘 속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다른 정치국원들에 비해 지나치게 앞서 나갔다.  

고르바초프의 지나치게 빠른 속도는 다른 정치국원들에게는 자신들의 특권이 위협받는 것으로 비춰졌다.  

반면 급진파들에게 그는 너무 느렸다.  

공산당 일당 독재를 끝내고, 계획경제 시스템도 해체할 것을 바란 급진 개혁파에게서도 이때문에 고르바초프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정책은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그는 개혁 속도 조절을 갈구했지만 심각한 경제난으로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은 또 소련 체제 시절 수면 아래 숨어 있던 민족성 문제를 폭발시켰다. 글라스노스트로 인해 발트해 국가들부터 다른 공화국들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 후반 소련은 각 민족국가의 독립 목소리로 몸살을 앓았다.  

외교적으로는 성공을 거뒀다.  

서방 정상들로부터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는 고르바초프를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남자"라고 추켜세웠다.  

고르바초프는 1986년에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에게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보유한 장거리 미사일을 모두 없애자고 제안했다.  

냉전 종식의 시작이었다.  

그는 1990년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간 중거리핵감축조약(IRNFT)은 2019년 폐기될 때까지 30년을 살아남았다.  

 

 

동구권 붕괴

 

고르바초프와 군축합의에 이른 미국은 이를 기회로 동유럽 국가들 일부를 서방으로 끌어들였고, 독일 통일과 통일 독일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때문에 옛 강경파 공산당원들이 분개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 고르바초프가 우크라이나 크름반도로 휴가를 떠나 있는 동안 강경파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는 소련내 최대 공화국인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진압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반쪽짜리 개혁 비판론자였지만 시민들과 합심해 쿠데타를 제압했다.  

쿠데타는 막았지만 각 공화국의 독립 물결은 막지 못했다.  

공화국들이 잇달아 독립을 선언하자 그 해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나 이후 재야에 묻혀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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