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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대왕 투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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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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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 부동산대재벌 광개토대왕(긍정적으로 영토뽕 취하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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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직접창제(자기 아들대리고) 완성 1443년, 반포 1446년 세종대왕

 

댓글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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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이 없습니다.
  • 전향자<span class=Best" />
    전향자Best
    2021.11.21

    종모법이 노비의 수를 늘렸다는 건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대주의는 당시 조선이 가져야 할 필수외교이고요.

    세종은 비교불가의 압도적 군주입니다.

    간단한 사례로 조선왕조500년 내내 세종시절의 토지생산력을 따라 잡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그의 치세에 그림자가 존재할지라도 공의 압도적 크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상 제 생각이었습니다.

  • 홍까지마<span class=Best" />
    2021.11.21

    보론

    0.

    기본적으로 역사적 이해는 "그 시대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를 보게되면 모든게 미개해보일 뿐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수 없음.

     

     

    1. <<명.청 교체 시기에도 사대의 예를 다해야 한다며 국운이 다한 명을 따른다는 외교정책은 어불성설임. >>

     

    구체적 내용은 전향자님이 잘 설명하신듯. 따라서 생략

     

     

     

    2. <<사대부의 눈치를 보다 애비 태종이 시행한 종부법을 폐지 하고 종모법을 시행한 점에서 세종은 압도적 군주라고 볼수 없음. >>

     

    세종에 대한 각자의 평가는 존중함. 그러나 종모법을 단순히 "노비 늘리는 것은 좋지않아"는 역시 현재의 가치기준에서 판단한 것이라고 생각함.

     

    당시 조선전기 사회는 노비를 필요로 하던 사회였음. 그 당시 농업생산 방식이 노비를 이용한 "작개제"가 기본이었음. 병작제가 보편화된 것은 그 후라는 점.

    따라서 그 당시 노비의 수를 국가가 적절하게 조절했어야 했고, 세종도 그에 입각했을 뿐임.

     

     

     

    3. <<농업 생산량도 숙종때2200만석 세종때 630만석임. 경작지는 (세종이 170만결 숙종이140만결) 더 많음에도 숙종이 압도적임.>>

     

    이것은 단순 수치로 비교할 게 아님.

    세종과 숙종 사이의 시간적 텀이 근 300년임.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사회적 발전이 있었음. 대표적인 예로 농업기술 발전, 비료 등등.

     

    단순 "숙종2200만석, 세종 630만석, 숙종이 더 많네"는 너무 수많은 요인을 간과한 것이라고 생각함.

  • 유가영
    2021.11.21

    저는 정조도 좋아해요

  • 유가영
    완혜
    @유가영 님에게 보내는 답글

    황제로까지 추존되셨죠ㅋㅋ

  • 유가영
    무휼
    2021.11.21
    @유가영 님에게 보내는 답글

    정조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