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세종
족보란 시조를 기점으로 현재 자손까지의 계보를 기록한 책이다. 종적으로는 시조에서부터 이어지는 세계(世系)를 알 수 있고, 횡적으로는 동족 간 혈연적 거리를 알게 해준다.
족보는 중국 후한 시대 이후로 고관을 배출하는 가문이 중요해지면서 시작되었고, 육조 시대부터는 족보와 함께 보학(譜學, 족보를 연구하는 학문)이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부터 족보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5년)편찬된 문화 류씨의 <영락보>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6년(성종7년)에 간행된 안동 권씨의 <성화보>다.
족보에 기록되는 자손의 범위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15~16세기에는 친손과 외손에 상관없이 모든 자손을 족보에 기록했다.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는 17세기부터는 가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외손은 3대 이하 또는 사위만 기록하며 족보 기록이 부계를 강조하는 형식으로 변화되었다.
남녀의 기재 순서도 16세기까지는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했으나, 17세기부터는 남자를 먼저 기록하고 여자를 뒤에 기록했다.
더러는 여자를 기록하지 않고 사위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족보는 일반적으로 성씨의 근원과 내력을 기록한 서문으로 시작한다.
본문에서는 시조와 중시조를 설명하고 분묘도와 시조 발상지를 표시한 지도를 넣었다.
또한 이름 / 생년월일 / 관직 등 족보에 올라간 사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주요 자료를 간결하게 표시했다.
마지막은 시조를 시작으로 세대순으로 이름을 표기한 계보표를 실었다.
족보는 조선시대 양반으로 하여금 그 지위를 유지하며, 일족의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했다.
또 조상의 업적을 통해 자부심을 느끼면서 동족끼리의 협동과 단결을 이끌어냈다.
양반들은 외적으로는 족보를 통해 가문을 선택하고, 내적으로는 족보를 자신들이 다른 신분보다 우월하다는 척도로 삼았다.
족보는 한 성씨의 사적인 기록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공문서의 기능도 가졌다.
조선시대에 동성 간의 혼인을 판단하는 근거 자료가 되기도 해고, 면역 대상자를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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