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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조선사> 049 젊은 학자를 양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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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제4대 세종

 

세종은 즉위 초 개국에 참여했던 많은 관료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죽으면서 새로운 인재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세종이 구상하는 국가 운영을 위해서도 기존의 틀에 박힌 관리보다는 젊고 능력 있는 신진 인사가 필요했다. 

 

그 방안으로 세종은 1420년(세종 2년)에 고려 인종과 조선 정종 때 운영되었던 집현전을 부활시켰다. 

 

세종은 젊고 능력 있는 관료 10명을 선발해 집현전을 운영하려 했으나, 관청 책임자들이 업무를 핑계로 선발된 관료를 내놓지 않았다. 

 

세종은 집현전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관료들에게 화를 내며 이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선발된 관료를 내놓게 했다.

 

그 결과, 1435년(세종 17년)에는 집현전에서 수학하는 관리가 32명까지 늘어났고 이후 20명 내외로 정원이 고정되었다.

 

집현전에 선발된 관료는 학문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다른 관직으로의 이동이 허락되지 않았다. 

 

집현전 내에서 직제학 또는 부제학까지 승진한 관료는 육조나 승정원 등으로 나가 그동안 익힌 역량을 발휘토록 했다. 

 

세종이 인재를 양성하고자 특별히 세운 만큼, 집현전 학사에게는 많은 특혜가 주어졌다.

 

구하기 힘든 서적을 국가에서 제공했고, 업무를 멈추고 집이나 사찰 등지에서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는 사가독서제가 주어졌다.

 

세종은 집현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커, 집현전을 수시로 방문해 학사를 격려하고 그들의 시험을 시험했다.

 

그 덕분에 집현전 학사들은 늘 긴장을 풀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학문 연구에 매진해야만 했다. 

 

한 예로 집현전에서 책을 읽다 잠든 신숙주에게 세종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손수 덮어준 사건은 세종의 관심과 기대,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집현전에서는 유교만 아니라 전문 분야를 선택해 공후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해 주었다. 

 

그 결과 집현전은 유교 / 역사 / 지리 / 의학 / 천문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할 수 있었고 신숙수 / 박팽년 / 하위지 / 설순 등 집현전에서 배출된 학자들은 새로운 문물제도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442년(세종24년)에는 세자의 정무 처결 기관인 첨사원이 집현전에서 설치되면서 집현전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문종 때는 집현전 학사들이 정치적 의견을 왕에게 직접 건의하며 정책 운영의 핵심 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세조는 집현전이 왕권을 약하시키는 기구라고 생각해 그 기능을 축소하다가, 박팽년 / 하위지 등 집현전 학자 출신이 단종 복위를 도모한 사건을 계기로 1456(세조 2년)에 집현전을 폐지했다.

 

집현전은 비록 폐지되었지만, 성종 때 홍문관으로 계승되어 조선 전기의 문물을 완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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