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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조선사> 048 장영실, 끝내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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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제4대 세종 

 

장영실(1390년경~?)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주 또는 향주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관청에 소속된 기생이었다.

 

종모법에 따라 어머니의 신분을 물려받은 장영실은 부산 동래의 관노로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장영실의 손재주가 뛰어나 못 고치는 물건이 없다고 한양까지 알려지자 태종은 장영실을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인재를 우대하는 세종은 장영실이 철을 다루는 제련과 축성 / 농기구 / 무기 제조 등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자 그에게 깊은 관심을 두었다.

 

1421년(세종3년), 세종은 장영실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명나라로 그를 유학 보내 과학기술을 익히도록 했다. 

 

장영실이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세종은 그를 궁궐의 재물과 보물을 관리하는 상의원 별좌로 임명해 천민의 신분을 벗게 해주었다.

 

이는 세종이 장영실을 활용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와 장영실의 능력, 그리고 신분 이동이 가능했던 조선 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434년(세종16년), 천민의 신분을 벗어던진 장영실은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자격루를 만들었다. 

 

제작된 자격루에 크게 흡족한 세종은 장영실에게 포상으로 정4품 호군의 관직을 내렸다.

 

많은 이가 장영실에게 내린 관직이 과하다고 반대했지만, 세종은 태종 시절 평양 관노 김인이 호군이 되었던 사실을 제시하며 앞으로도 장영실을 중히 여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세종의 태도에 감복한 장영실은 더욱 일에 매진해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를 제작하고, 물시계 옥루를 만들었다. 

 

장영실의 업적이 쌓이고 쌓일수록 그의 직책도 올라가 장영실은 종품3의 대호군까지 승진했다.

 

이처럼 세종의 총애를 받던 장영실이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 허무했다. 

 

세종은 강원도 이천에 있는 온천까지 타고 갈 안여(가마)제작에 장영실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천으로 가는 도중 세종이 탄 안여가 비로 인해 질퍽해진 길에서 부서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세종은 장영실에게 안여가 부서진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를 때리고 그를 유배 보냈다. 

 

이후 장영실의 생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의문스러운 점은 장영실에게 안여가 부서질 리 없다고 장담했떤 조순생은 세종의 특별 지시로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간의대 제작으로 생긴 명나라와의 갈등에서 장영실을 보호하려 했다는 주장과 장영실의 폐기론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현재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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