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1일 1페이지 조선사> 047 남자의 귀고리를 금하다

profile
김세정

제4대 세종

 

남자가 귀고리를 하고 다니는 것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우리의 전통이었다. 당나라에 입국한 여러 사신의 모습이 담긴 <왕회도>를 살펴보면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사신 모두가 귀고리를 하고 있다. 

 

이 풍습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많은 남자가 신분에 상관없이 귀고리를 하고 다녔다. 

 

세종도 귀고리 착용을 금지하기보다는 허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1419년(세종1년) 세종은 금과 은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으니 금과 은으로 술잔이나 밥그릇을 만들지 말라는 교서를 내렸다. 

 

이때 몇 가지 품목은 제외했는데, 이 중 하나가 사대부 자손들의 귀고리였다. 그만큼 귀고리는 사치 품목이 아닌, 일상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물품이었다.

 

중종 때도 양평군이 9세 때 큰 진주 귀고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에서도 귀고리 착용이 일상의 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귀고리는 모든 남성이 하고 다닐 정도로 보편적인 풍속이었지만 이것은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는 조선 중기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572년(선조5년), 선조는 "신체발부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업신을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일체 고치도록 가르쳐라. 한양은 이달을 기한으로 하되 혹 꺼리어 따르지 않는 자는 엄하게 벌을 줃록 하라."라고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어명만으로는 그동안 해오던 남성의 귀고리 착용을 막지 못했다. 20년 뒤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명나라 사신과 이덕형이 나눈 대화는 남성들의 귀고리가 얼마나 보편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명나라 사신과 이덕형은 군공을 노리는 일부 군인들이 일반 백성을 죽여놓고 왜적을 죽였다고 속이는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죽은 이의 귓볼에 귀고리 구멍이 있는지를 살피자는 의견을 나누었다.

 

이는 선조의 어명 이후로도 남성들이 계속 귀고리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남성이 귀고리를 하고 다닌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귀고리를 신분과 구너력의 상징으로 여겼기때문이었다. 

 

조선시대는 신분이 높을수록 금과 은을 사용해 크고 화려한 귀고리를 하고 다녔다. 

 

두 번째는 멋이었다. 당시 남성들은 자신의 개성을 뽐내는 데 귀괴를 활용했다. 하지만 성리학이 뿌리는 내리면서 점차 남성의 귀고리 착용은 줄어들다가 사라졌다.

 

마침내는 귀고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겨, 남성의 귀고리 착용을 부정적으로 보는 평가가 보편화되었다. 

댓글
3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