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70년대 초에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쓴 風濤(풍도)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노우에 야스시란 소설가는 ‘돈황’이란 역사 소설과 '氷壁'(빙벽)이란 등산 소설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죽은 이노우에 야스시는 아주 간결한 문장으로써 여운이 오래 남는 이야기를 엮어가는 소설가입니다. 바람 風, 파도 濤자의 이 풍도란 소설의 주인공은 몽골제국인 원나라에 지배당하고 있던 고려 시대의 장군 金方慶(김방경)이었습니다. 당시 몽골은 일본으로 원정하기 위하여 고려의 남해안, 지금의 마산 부근에서 함선을 건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술자들 3만5000여 명이 동원되어 900여 척의 배를 만들었습니다.
제1차 원정은 서기 1274년 고려 충렬왕 원년이었습니다. 이때 동원된 원정군은 몽골군과 중국 漢族(한족) 군대를 합쳐서 2만5000명, 고려군이 8000명, 키잡이, 안내자, 뱃군을 합쳐서 6700명으로서 총 4만을 넘는 大軍(대군)이었습니다. 고려군의 사령관은 김방경이었습니다. 이 원정군은 합포, 즉 지금의 마산항을 출발하여 대마도에 상륙했습니다. 간단하게 이 섬을 점령한 연합군은 9일 뒤에는 일본 큐슈 연안에 있는 잇기 섬을 점령했습니다. 대마도와 잇기 섬의 영주들은 모두 싸우다가 죽었고 일본 무사들은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잇기 섬을 점령한 5일 뒤에는 드디어 하카다만에 당도했습니다. 하카다는 지금의 큐슈 후쿠오카입니다.
다음날 큐슈에 상륙한 몽골-고려 연합군은 본격적으로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군대와 접전을 벌였습니다. 일본 무사들은 1대1의 결투를 중심으로 하는 戰法(전법)을 익혔지만 몽골군대는 조직적인 싸움에 능한데다가 일종의 대포까지 갖고 와 쏘아대니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金方慶의 지휘하는 모습을 高麗史(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군이 몰려와서 長劒(장검)이 바로 좌우에서 번득이었으나 김방경은 심어놓은 나무마냥 조금도 물러서지를 않았다. 김방경은 효시, 즉 전투 신호용 화살 하나를 뽑아 쏘고 소리를 높여 외치니 왜군들이 놀라서 기가 죽어 달아났다. 왜군이 大敗(대패)하고 엎드려진 시체가 삼을 베어 눞인 듯이 많았다.〉
몽골-고려 연합군은 밤에는 하카다만에 정박시켜둔 함선에 돌아가서 쉬었는데 어느날 태풍이 불어와서 이 함선들이 대부분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 태풍으로 溺死(익사)한 원정군의 수가 1만3500명이었다고 합니다. 태풍이 보호하여 일본을 살려낸 셈입니다. 일본의 역사가 바뀔 뻔했던 이 원정의 지휘관인 김방경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왜 일본의 소설가가 썼을까 하는 의문을 저는 갖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風濤란 소설에는 일본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고 고려 이야기만 나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몽골의 지배를 받아 신음하는 고려 사람들의 고통이 肉聲(육성)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김방경의 곤혹스런 처지도 답답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는 두 사람의 상관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의 사령관과 고려왕이 그들이었습니다. 김방경으로서는 몽골군 사령관이 시키는 대로 했다간 고려 백성이 고생할 것이고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가는 고려왕의 입장이 난처하게 될 처지에 있었습니다. 고려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고려 주둔 몽골군대의 사령관인 흔도가 하루는 김방경에게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우리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몽골軍을 관할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고려軍을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그대는 매양 일만 있으면 고려왕에게 미루고 고려왕은 그대에게 밀어버리니 과연 누가 고려군의 일을 맡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김방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출정시에는 군대를 장군이 관할하는 것이고 평화시에는 國王(국왕)의 관할을 받는 것이니 본래 법이 그렇지 않은가.”
이 말이 끝나자 흔도는 새를 한 마리 잡아서 갖고 놀다가 김방경이 보는 앞에서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한 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오”
김방경이 대답합니다. “농부들이 힘써 농사를 지어놓으면 이것들이 와락 달려들어 곡물을 다 쪼아먹어버리니 장군께서 그 새를 죽인 것은 잘한 일입니다.”
다시 몽골장군 흔도가 정색을 하고 말합니다.
“내가 여기에 와서 보아하니 고려사람들은 모두 글을 아는 것이 중국의 漢族과 꼭 같다. 그리하여 속으로는 우리 몽골 사람들이 살육을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몽골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그런 살육할 권리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죄가 되지도 않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대 고려사람들이 우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유이다.”
흔도의 이야기는, 글을 좀 안다고 해서 까불지 말라는 비아냥이 담긴 말입니다. 몽골사람들은 그런 글 따위는 모르고 다만 군사력이 바로 正義(정의)라는 단순한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너무 머리를 굴리고 꾀를 부리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는 한 마디였습니다. 그러나 김방경으로서는 그런 꾀라도 쓰지 않으면 우리 백성을 모조리 이 사나운 몽골 군대의 처분에 다 내어놓아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김방경은 몽골 군대의 지휘하에서 삼별초를 토벌하는 책임도 떠맡았습니다.
고려 왕실은 강화도에서 약 30년간 몽골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항복하고 육지로 나올 때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삼별초란 부대는 원래 최씨 武臣(무신) 정권 때 수도이던 開京(개경)을 지키던 특수정예부대였습니다. 여기에다가 몽골군대에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사람들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몽골군대에 대한 증오심은 대단했습니다. 이 삼별초는 고려 왕실의 해산명령에 불복하고 강화도를 봉쇄한 다음 왕족의 한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고 계속해서 몽골에 저항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육지와 너무 가까운 이 강화도에서는 장기抗戰(항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서해안을 따라서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진도에 성을 쌓고 궁전까지 건설한 삼별초는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고 남해안과 서해안, 그리고 전주까지 위협하여 왕실에서 조세와 쌀을 거두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1271년 몽골과 고려 연합군은 진도를 함락시켰습니다. 삼별초 대장 金通精(김통정)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다시 제주도로 들어가 抗戰을 계속했습니다. 1273년 몽골 고려 연합군은 김방경의 실질적인 지휘하에 1만 명의 군인과 160척의 함선을 이끌고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의 함덕 포구에 상륙하여 삼별초를 섬멸하였습니다. 삼별초의 이 장렬한 몽골에 대한 항전은 고려 무신정권의 투지를 엿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같은 고려 군대에 의하여 마치 반란군이 토벌되듯이 사라져갔다는 점에서 패전국의 悲運(비운)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한때의 戰友(전우)들을 토벌해야 했던 김방경의 고민 또한 깊었을 것입니다.
저는 조선조 문종 때 김종서 정인지가 편찬한 고려사를 읽으면서 왜 일본인 이노우에 야스시가 김방경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하는 오랜 의문을 풀 수가 있었습니다. 김방경의 생애는 이순신의 생애처럼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었습니다. 몽골帝國(제국)의 압제를 피해가면서 고려왕실과 고려백성들을 보호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뇌하면서 묵묵히 걸어갔던 한 巨人(거인)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아마도 고려사를 읽고서 김방경의 생애에 감동되어 '風濤'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李舜臣(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듯이 김방경도 억울한 고초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간교한 부하 몇 사람이, 김방경이 강화도로 들어가서 몽골군대를 몰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략을 하여 몽골측에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고려왕실에서 조사해보니 터무니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려인으로서 몽골에 귀화하여 고위직에 있었던 홍다구가 이 소식을 元(원)의 수도 燕京(연경)에서 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고려를 반역하여 몽골에 붙은 경력이 있는 집안의 아들로서 자신의 조국 고려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어 기회만 있으면 몽골의 위세를 빌어 고려왕실과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던 인간이었습니다. 이 홍다구가 쿠빌라이 황제에게 간청하여 스스로 신문관이 되어가지고는 고려로 와서 직접 김방경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홍다구는 겨울에 늙은 김방경을 벌거벗겨놓고는 쇠사슬로 목을 조이고 때리는 고문을 자행하였습니다. 보다못한 고려 충렬왕이 “이 문제는 이미 무고한 것으로 판정이 난 것인데 왜 또 조사를 하는가”라고 만류했으나 홍다구는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듣지를 않았고 왕은 구경만 할 뿐이었습니다. 김방경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기절하고 다시 살아나는 고문을 견디면서 끝까지 거짓 자백을 거부했습니다. 홍다구도 신문조사에서 별 성과가 없어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충렬왕의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김방경이 자백하면 그 한 사람에게만 벌을 줄 것이요. 그것도 귀양 보내는 정도로 가볍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충렬왕은 김방경에게 사정하다시피 합니다.
“이런 고문을 계속해서 받으면 장군이 결국 죽을 것이오. 그러니 일단 거짓 자백이라도 하여 우선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오. 더구나 元의 황제께서는 어질고 거룩하신 분이니 진실을 밝혀줄 것이오”
김방경은 이렇게 거절합니다.
“왕은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일개 병사의 몸으로 출세하여 직위가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저의 간과 골이 땅바닥에서 구르게 된다고 해도 나라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겠거늘 어찌 一身(일신)을 아끼여 근거 없는 죄명을 둘러쓰고 국가를 배반하겠습니까.”
김방경은 홍다구를 향해서 “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나는 부당한 일을 가지고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아무런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 홍다구는 김방경이 갑옷을 집에 감추어두었다는 엉뚱한 트집을 잡아서 그를 대청도로 귀양보냈습니다.
쿠빌라이 황제는 김방경의 용맹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김방경이 숨겨놓았다는 갑옷이 몇 개나 되더냐고 고려 측에 물었습니다. 고려왕실에서 마흔여섯 벌이라고 대답하니 웃으면서 “아니 반역을 도모한다는 사람이 마흔여섯 벌의 갑옷으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리하여 고려 충렬왕이 연경으로 와서 보고하도록 하고 올 때는 김방경을 귀양지에서 석방하여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하여 목숨은 건지게 되고 복직도 되었지만 김방경은 사표를 냈습니다. 그때 나이가 이미 60대 후반이었던 것입니다. 충렬왕은 그러나 간곡히 타일러 사표를 되돌려주고는 제2차 일본 원정군의 고려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또 다시 惡役(악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 제2차 일본 원정군의 규모는 제1차 원정 때보다 네 배나 되는 엄청난 함대였습니다. 서기 1281년 5월 합포, 즉 마산을 떠난 몽골 고려 漢族 연합군은 병력이 4만에 함선이 9백 척이나 되었습니다. 이 함대를 東路軍(동로군)이라 불렀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중국 남쪽에서 출항한 강남군은 옛 南宋(남송)의 해군을 主力(주력)으로 하여 함선이 3500척, 병력은 10만이나 되었습니다. 江南軍(강남군)과 동로군을 합치면 15만이 되는 원정군이었습니다. 이는 당시까지의 세계전쟁사에서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상륙작전이었습니다. 중세의 프랑스와 영국이 싸웠던 백년전쟁 때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에 상륙한 영국의 군대는 1만을 넘었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제2차 일본원정 규모의 上陸(상륙)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15만이 움직인 이 원정은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때 일본이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더라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고 임진왜란도 日帝(일제) 36년의 식민지 시대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마산을 먼저 출항한 동로군은 대마도와 잇기 섬을 점령한 다음 일본의 큐슈 후쿠오카에 상륙하려고 했으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 가마쿠라 막부 군대가 완강하게 저항하여 일단 다카시마 섬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여기서 중국 남쪽에서 출항한 강남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느라고 한 달여를 보냈습니다. 이때 몽골 군대의 장수 흔도와 홍다구는 강남군이 올 기한이 지났으니 철수하자는 주장을 내어놓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김방경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석 달 식량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아직 한 달분의 식량이 남아 있다. 그러니 강남군이 도착할 때를 기다려 반드시 일본을 격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며칠 있다가 강남군이 도착하여 合流(합류)했습니다. 이 사상최대의 함대는 힘을 모아서 후쿠오카를 치는데 또 태풍이 불어닥쳤습니다. 고려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8월에 폭풍을 만나서 모두 물에 빠져죽고 그 시체들이 썰물과 밀물을 따라 포구에 밀려들어 포구가 시체로 가득 찼으므로 시체를 밝고도 걸어다닐 수가 있을 지경이었다. 그로 하여 마침내 回軍(회군)하였다.〉
15만의 원정군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김방경을 포함하여 약 3만이었다고 합니다.
두 번의 몽골침략을, 태풍의 도움으로 물리쳤던 일본은 이 태풍을 가미카제, 즉 神風(신풍)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두 번째 원정에서 왜 김방경이 철군을 반대하고 끝까지 싸우려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의 짐작으로는 원정 준비 때문에 하도 고려백성들을 고생시켰기 때문에 이번에는 양단간에 결판을 내어서 다시는 전쟁준비를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당시의 고려 인구는 지금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나라 형편에 두 번의 전쟁을 위하여 근 2000척이나 되는 배를 만들고 수많은 군사를 내었으니 그 고생이 어떠했겠습니까. 전쟁 준비의 惡役을 맡아서 백성들을 부려야 했던 김방경의 고민 또한 상상이 가는 것입니다.
김방경은 나이 일흔둘에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김방경이 하루는 고향인 안동으로 성묘를 가는데 왕이 김방경의 아들을 수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일행이 안동에 도착하니 김방경의 친구들이 며칠 묵고 가라고 붙들었습니다. 김방경은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들일 때가 되었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
김방경은 長壽(장수)했습니다. 그는 여든아홉에 죽었습니다. 고려사는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습니다.
〈김방경은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일을 처리해나가는 데 조금도 착오가 없었다.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고 절약하는 氣風(기풍)을 견지하였으며 대낮에는 드러눕는 일이 없었고 늙었으되 머리칼이 검은 채로 남아 있어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능히 견디었으며 병환이라곤 없었다. 또 옛 친구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누가 죽었다 하면 꼭 문상하러 갔으며 일평생 임금의 잘못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고 현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된 뒤에도 나라 일을 집안 일 근심하듯 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안동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으나 그 당시 정권을 잡았던 사람들이 이것을 싫어하여 禮式(예식)대로 장사지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후에 왕이 이것을 후회하였다.〉
김방경의 생애와 이순신의 생애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모함을 당하고 나서도 조국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고서 모든 것을 던져 나라와 백성을 위했다는 점입니다. 亂世(난세)에 태어난 이 두 巨人(거인)은 조정이나 신하나 백성들에 대하여 섭섭한 생각이 있더라도 그런 것들을 사소하게 넘기고 오히려 국가라는 大義(대의)를 위하여 全생애를 투척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한국인이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그런 충성은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가슴 가득히 깔려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점에서 충무공과 김방경은 위대한 휴머니스트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두 분의 생애에서 위인들을 괴롭히고 巨木(거목)을 찍어내리려고 하는 추악한 소인배들의 모습도 함께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 민족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빛과 그림자일 것입니다.
와 장문의 정성글이노...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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