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세종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곧바로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군사권과 인사권까지 넘겨주지 않은 채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이는 세종이 종친과 신료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관점에서 태종은 장차 위협이 될지도 모를 세종의 장인 심온(1375~1418년)을 제거해 외척이 부리는 권세를 견제하고자 했다.
심온은 11세라는 어린 나이로 감시(監試)에 급제하며 많은 이의 기대를 받던 인물이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심온은 대호군을 비롯해 한성부 판윤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사람들은 심온에 대해 평가하기를, 인자하고 온순하면서도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엄격함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런 그가 세종의 장인이 되자 많은 이가 좋아했다. 그러나 태종은 심온의 평가가 너무 좋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침 많은 사람이 명나라 사신으로 떠나는 영의정 심온을 배웅하는 모습을 본 태종은 외척이 부릴 권세를 걱정했다.
여기에 병조좌랑 안헌오가 '심온의 동생이던 심정이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났음에도 군권을 놓지 않는 것을 비난했다.'라고 고해바치자, 태종은 심온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태종은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 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한 것을 문제 삼아 그를 모반죄로 심문했다.
사기그릇의 깨어진 조각인 사금파리에 무릎을 꿇리고 무거운 돌을 얹는 압슬형을 견디지 못한 강상인은 심온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거짓 자백을 했다.
이를 근거로 태종은 명에서 돌아오던 심온을 의주에서 체포한 뒤, 수원으로 압송해 심문했다.
하루 사이에 세 차례나 압슬형을 받은 심온은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역모죄를 시인하면서 태종에 의해 사약을 들게 되었다. 그의 나이44세였다.
당시 세종은 장인이던 심온이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왕의 업무를 보았다. 부인 소현왕후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간청했으나 세종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종이 벌인 잔치에 참석하며 심온의 죽음에 간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세종은 태종이 죽고 자신의 정치를 펼 수 있게 되었을 때도 심온의 관작을 복구해주지 않았다. 이는 태종을 향한 세종의 효심과 배려심이었다.
심온은 문종 때에 이르러서야 관작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어렵다 어려버 한 순간에 죄인 만들어 버리네 ㅎㄷㄷ
세도정치를 막은인물
어렵다 어려버
영조,정조 도 영종,정종에서 조로 높인것도
고종 때로 알고 있어요. 원래 고종의 할아버지 남연군은 인조 셋째아들 인평대군으로 영조의
후손인 은언군,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왕위에 올라 영조,정조로 시호를 높인것으로
알아요.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