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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칼] 역경루는 불타오르는가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칼’럼

방구석여포로 민심이반 자초해 망한 공손찬

강서보선 관련해서도 뉘우침‧결자해지 필요

 

화려한 경력‧미담의 공손찬

 

공손찬(公孫瓚‧생몰연도 ?~서기 199)은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등에 등장하는 후한(後漢) 말 군벌이다. 소설에선 유비(劉備)를 조력한 선인(善人)으로 그려지나 실은 내외 대상 폭주 벌이다 자멸한 필부(匹夫)다.

 

정사삼국지에 의하면 공손찬은 당초 행정능력‧의기(意氣)로서 명성 모았다. 고관(高官) 집안 서자로 태어난 그는 말단문관으로 공직생활 시작했다. 깔끔하고도 명확한 일처리에 그럴듯한 풍채인 공손찬 이름은 곧 널리 퍼졌다. 요서태수(遼西太守)는 제 딸을 시집보내 사위 삼았다.

 

태수의 전폭적 지원에 당대명사 노식(盧植)으로부터 사사(師事)한 공손찬은 후임태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모시던 상관이 국토 동북방 요서에서 최남단 교주(交州) 일남군(日南郡‧지금의 베트남 중부)으로 유배되자 “안녕히 가세요” 배웅하는 대신 따라나섰다. 대륙을 관통하는 귀양은 가다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태수는 유배 도중 사면돼 복귀했다.

 

공손찬은 무(武)에서도 특출났다. 높아진 명성으로 제수받은 요동속국(遼東屬國) 장사(長史)직 또한 목숨 내놔야 했다. 요동은 오환(烏桓)‧선비(鮮卑) 등 아는 건 살인‧약탈밖에 없는 이민족들 출현하는 마굴(魔窟)이었다. 게다가 동쪽에는 부여(扶餘)‧고구려 등 강국들이 버티고 있었다.

 

이러한 요동에서 공손찬은 수십 기병만으로 수백 선비기마를 격퇴하는 등 기염(氣焰) 토했다. 후일 공손찬의 정예 백마의종(白馬義從)은 하북(河北)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실상은 허명이었을 뿐

 

그런데 사실상 하북 챔피언이 된 공손찬은 천성이 원래 그랬는지 사람이 변했는지 탐욕‧무능을 드러낸다. 그는 사실상의 상관이자 노신(老臣)이었던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193)를 공경하고 가르침을 얻는 대신 노골적으로 시기질투했다.

 

그 무렵 공손찬 휘하는 황건적(黃巾賊) 잔당 및 백파적(白波賊) 등 도적떼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노략질 일삼았다. 자연히 민심은 극도로 악화됐다. 유우는 “당장 그쳐라” 꾸짖거나 때로는 알아듣기 좋게 타일렀다. 허나 공손찬은 “저 힘도 없는 ‘꼰대’가 감히 이 하북패왕님께 이래라 저래라 하네. 이놈의 나라는 정신머리 안 바꾸면 망하는 게 낫습니다” 취지로 건들건들했다.

 

그 당시 천하정세는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수도 낙양(洛陽)에선 천하의 역적 동탁(董卓)이 천자(天子)를 주물럭거리며 역성혁명(易姓革命) 꾀했다. 하북에서도 신진세력 원소(袁紹)가 황족 유우를 새 천자로 추대하자 선동하며, 물론 유우는 일언지하 거절했지만, 마찬가지로 역모 꾸몄다. 이들의 첫 제거대상은 단연 최대위협 공손찬이었다.

 

당연히 공손찬‧유우는 개인적 감정은 잊고 거국적(擧國的)으로 일삼단결해야 했다. 공손찬은 자신의 무력에 유우의 인망(人望) 시너지효과라면 충분히 패자반열에 오르고 제 한목숨도 챙길 수 있었다. 허나 공손찬은 과거의 현명함은 허명(虛名)이었는지 욕망에만 충실했다.

 

공손찬은 우선 최측근 엄강(嚴綱)‧전해(田楷)‧추단(鄒丹)을 각각 기주자사(冀州刺史)‧청주자사(靑州刺史)‧병주자사(并州刺史)에 멋대로 임명했다. 각 주 군현(郡縣) 태수‧현령(縣令)도 모두 공손찬 사람이 됐다. 조정 총의와 황제 결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쯤 되면 안 망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기주목(冀州牧) 원소는 셀프역적 인증한 공손찬 토벌 위해 충신코스프레(흉내) 내며 북진했다. 아무리 원소가 군세(軍勢)에서 절대열세이고 아무리 헌제가 이름뿐인 황제라 해도 400년 한나라 권위(權威)와 그 천자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천하의사(義士) 상당수가 언뜻 보기엔 충신‧역적으로 엇갈리는 두 사람 중 누구를 따를지는 자명했다.

 

원소를 따른 이들 중에는 독립군벌 격이었던 국의(麴義)란 장수가 있었다. 국의는 멀리 서쪽 강족(羌族)과 오랜 기간 맞서 싸우는 등 대(對)기병 전술에 능했다. 192년의 계교전투(界橋之戰)에서 화려한 백마의종은 단 번에 원소 측을 짓밟으려 달려들었다. 보병방진(步兵方陣) 뒤에 조용히 숨어있던 국의의 강노수(強弩手)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화살비 쏟아 부었다. 이 한 차례 회전(會戰)으로 하북의 강자‧약자 자리는 뒤바뀌기 시작했다.

 

허를 찔렸음에도 공손찬은 내부총질 멈추지 않았다. “개전(改悛)의 정(情)이 없구나” 한탄한 유우가 193년 겨울 10만 병력 이끌고 물리치료하러 오자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나거나 화친 제안하는 대신 “안 그래도 성질 뻗치는데 너 잘 만났다” 대대적 역공(逆攻) 펼쳤다.

 

만만한 선비나 괴롭힌 공손찬은 “내 뜻은 그게 아니오 선생” 해명하고 석방하는 대신 유우 목을 쳐버렸다. 그것도 “이 한겨울에 비 내리면 살려주겠다” 조롱까지 섞어서 말이다. 나아가 중재 위해 파견된 천자의 사자 단훈(段訓)을 억류한 뒤 강제로 유주자사(幽州刺史) 바지사장으로 임명하는 등 만천하에 거하게 엿 먹였다.

 

‘방구석여포‧면피’ 일심단결 한 듯한 그들

 

만약 나라의 중진(重鎭) 유우가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공손찬도 목숨 부지했을 테고, 한나라가 원소 및 망탁조의(莽卓操懿) 중 뒤의 셋에 의해 폐족폐당(廢族廢黨)되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동탁 및 그 잔당과 원소에겐 찍소리 못하고 얻어터진 주제에 방구석여포 기세나 자랑한 공손찬은 결국 당연한 업보(業報)에 직면했다.

 

유우 휘하들은 하북 곳곳에서 게릴라전 펼치며 끝까지 저항했다. 원소는 언제 역적질 꾀했냐는 듯 “저 무뢰배 공손찬 무찌르는 내 이름은 천사랍니다” 엔젤하트 날리며 인심(人心) 장악하고 공손찬을 압박했다. 하북 형세는 완연히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변해갔다.

 

“글렀구나” 느낀 공손찬 수하들도 잇달아 변심(變心)했다. 전해는 유비를 돕는다는 핑계로 서주(徐州)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맹장 조운(趙雲‧조자룡)도 “작년 돌아가신 형님이 올해 또 돌아가셔서 상 치러야 합니다” 총총걸음으로 실종됐다. 평소 유우의 덕망(德望) 존경하던 오환‧선비 등도 원소와 연합해 공손찬 뒷머리를 후려쳤다.

 

그 쯤 되면 공손찬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다 해도 답이 없었다. 일을 망친 걸 뒤늦게 깨달은 공손찬은 엉망진창이 된 수하‧천하에 제 희생으로서 사죄하는 대신 그래도 바득바득 살아보겠다며 발버둥 쳤다. 바로 기주 하간국(河間國) 역현(易縣)에 역경루(易京樓)라는 거대요새 짓고 최후의 발악에 돌입한 것이었다. 해당 요새는 10중 참호에 성벽은 10~20여m 높이에 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공손찬은 백성들 착취해 쌓아올린 근거지에서 백성들 수탈해 산더미처럼 쌓은 곡식으로 끈질기게 버텼다. 원소도 약 1년 동안 함락에 실패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기약 없는 수성전(守城戰)은 한계가 있었다.

 

우선 황충(蝗蟲)떼가 몰려와 곡식 대부분을 갉아 먹어버렸다. 이미 자포자기한 공손찬은 처첩(妻妾)들 빼곤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총애하는 신하는 그간 공손찬 등에 업혀 부정축재‧혹세무민한 점쟁이 유위대(劉緯臺), 거상(巨商) 이이자(李移子) 등이었다. 공손찬은 “한 놈을 구해주면 다른 놈들은 나태해져 싸우지 않을 것”이란 황당 이유 들며 포위된 채 울부짖는 아군도 구출하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병사들 태반은 싸울 의지 잃어버렸다. 끝내 원소군이 역경루 중앙망루까지 밀고 들어오자 공손찬은 제 손으로 일가(一家)를 모조리 죽인 뒤 자신도 분신(焚身)했다.

 

현 국민의힘 지도부 등이 ‘내년 총선 바로미터’라 선전하며 공 들였던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국민의힘 참패로 끝났다. 앞서 야당 대표 구속도 무위에 그쳤다. 헌데 정작 책임져야 할 소수는 면피(免避)에 급급하다는 지적 적지 않다. 이들은 그간 자당(自黨) 중진들 뺨 때리는 데만 뛰어난 능력 발휘하면서 여론악화 자초한 바도 있다. 최근에도 제3자들에게 책임 떠넘기는 듯한 인상이 짙다.

 

아무리 버틴다 한들 역경루는 불타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 필요한 건 진심 어린 뉘우침‧사죄 그리고 뒤늦은 결자해지(結者解之)와 당내 협치(協治)다. 그게 그들도 살고 조직도 살며 나라도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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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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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에서 우리 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 하면 태평양에서 빠져죽을 작정"이라는 말을 과연 지킬지 두고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