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학자들은
동아시아에 민주주의는 절대 이뤄지지 않을거라 생각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2020년 기준 아시아 1위수준의 완벽한 민주주의 국가이다.
많은 국가들이 5.18 6월항쟁등 민주화를 이루려던 대한민국을 최고로 치며 본받으려하고있다.
헌데 우리가 꾸준한 민주화운동으로 민주화를 이루었는데
북한은 왜 여전히 사이비공산국가*일까?
*소련이 붕괴하자 김일성을 신격화하며 왕정국가로 회귀했다.
그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있다...
제헌 국회의원 투표할때는 있었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선거구인
황해도 선거구를 아는가?
(참고이미지 11시방향)
황해도 선거구가 속한 황해도 남부는 6.25이후 북한땅이 되어버린 땅이며
소련군정의 뜻아래 김일성이 끊임없이 사상검열을 했던 동네이기도 하다.
그 황해도 지역중에서도
황해도 신천군은 한반도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의 피를 가장 많이 흘린지역이다.
우리가 최초의 선거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을 뽑자
김일성일가는 자기들이 손에 넣은 영역에
일방적으로 토지개혁을 진행시켰고
지주들의 땅을 모조리 몰수한 뒤 이들을 타지로 보낸다.
그리고 빼앗은 땅을 재분배하는 이른바 무상몰수,무상분배를 펼친다.
이런 일방적인 조처에 토지를 가진 지주들과 중산층 그리고 이곳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아온 사람들은 무척 반발한다.
타지에가서 어떻게 먹고살것인가? 왜 종교의 자유가 없는가? 왜 내가 무언가를 소유할 수 없는가?
반대로 지주들 밑에서 일하던 머슴들이나 전답이 없는 빈농등은
공산당을 반겼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에는 소작농이 지주에게 내는 소작료가 수확물의 절반을 상회하였고,
심할 경우 80%에 달했기 때문에 소작농과 빈농들은 1년 내내 아등바등 죽어라 일해도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중국의 간도(지금의 연변지역) 등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토지를 무상으로 준다고?
당연히 유혹적일 수밖에.
결국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것,강제로 타지역으로 보낸다는것, 종교의자유가 없다는것에
반발하여 공산주의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과 무상으로 땅을 분배한다는 공산주의를 찬성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지역자체가 반으로 갈라지게 만든다.
거기에 상층계급이 좌익들은 다 가난하다고 업신여기는 태도등은
반공은 부자들만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버렸다.
김일성일가는 계속해서 사상검증 , 민간 자택수색을 통해
공산주의에 찬성하지않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보인 사람들을
계속 처형하였는데 이 숙청의 바람은 황해도에 다다르게 된다.
1950년 4월 17일 조선민주당의 당수가 멋대로 감금되고 당자체가
중도에서 점점 빨치산쪽으로 변해가는 상황이 찾아온다.
이에 조선민주당*의 재령군당 위원장 김씨와 정씨는 대한광복회를 발족시킨다.
조선민주당?
이들도 김구처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당이다.
김일성은 당수 조만식을 호텔에 감금했고
새로운 당수로 빨치산파 최용건을 새 당수로 추대한다.
조당 조만식
당수인 조만식은 미국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추진해보려 했을만큼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였으며 기독교 장로이기도 했다.
김일성과 소련은 그를 반동분자로 보아 평양호텔에 감금했으며
남한에서 빨치산활동을 하던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하자고 한다.
이승만은 확실히 하기위해 먼저 고당 조만식선생을 보여달라했고
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하다 없던일로 만든다.
그리고 한국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15일
조만식은 북조선 내무성 안에서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된다.
훗날 1970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됨.
최용건
조선인민군 제 1대 총사령관
조만식을 감금시키고 당을 장악한 인물
그는 학식이 모잘라서 김일성더러 최고자리에 오르라고 양보함.
1946년 2월부터 반동 숙청에 열을 올린 인물로써
조선로동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판,협박,회유 심하겐 숙청한 사람이다.
발족된 대한광복회를 비롯하여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북이 남침할때는 징병을 피해 월남하거나 구월산에 숨어있다가
UN군이 북진하기 시작하자 1950년 7월 구월산반공유격대를 조직한다.
이들은 그동안 김일성무리에게 잡혀간 가족들과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1950년 무기수송차량을 습격하여 무기를 습득하였고,
UN이 해주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신천과 제령에서 거사를 준비한다.
1950년 10월 12일 부터 10월 14일까지 벌어진 전투
이들은 내무서를 점령하였고 잡혀있던 반공청년 80명을 감옥에서 구한다.
그런다음 신천 시가지에 태극기를 계양한 그들은 여러 관공시설과 방송사를 점령하여
의거대가 시가지에 들어갔음을 알렸고
이에 각 황해도 신천과 재령군에 속한 모든 면들도 다같이 들고 일어난다.
이에 맞서서 공산당원들은 군당본부에 집결한 후 해주로부터 22개의 트럭을 타고
의거대에게 반격을 하러온다.
의거대는 일제히 반격작전을 게시했고
10월 17일 공산당원들을 물리치는데 성공, 18일 도착한 UN군을 대대적으로 환영한다.
하지만 이 의거대는 크나큰 과오를 저지른다.
계속해서 공산주의자와 북한에게 사상을 빌미로 죽임을 당하고 핍박받던 그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이틀동안 공산군의 손에 죽은 천여구의 시신을 보고
이성을 잃어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공산당원의 가족들, 정치적인이유없이 살고있던 주민들등까지
의거대는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 보복사살한것이다.
그들은 반공을 외치다가 결국 그들처럼 되어 약 3만명을 학살하게 된다.
1950년 매카시즘광풍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던 시기임
특히 연좌제,가족을 죽이는 행위는 아버지나 누군가가 열심히 국가를 위해 싸우는데 가족이 빨갱이로 낙인찍혀 살해당하는일도 빈번했음.
전쟁후 그 사실을 알고 군을 그만두거나 탈영한 사람도 속출했었다고함.
*북한이 주장하는 미국이 학살했다는건 사실이 아님.
미군이 도착하기전 학살이 벌어졌고 해리슨사령관은 황해도에 간적이 없음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사건이 알려져 국제적으로 조사를 하는데 학살이 있던것은 사실이고 미국이 한것은 아닌게 밝혀짐.
또한 북한이 주장한 10만명이니는 과장이고 3만명 정도로 추정되었음. 이는 황해도 인구의 25%임
북한군을 몰아낸 기쁨도 잠시.
1950년 10월 25일쯤 중공군이 들이닥치면서 전황이 바뀐다.
계속 밀리고 밀리던 1950년 겨울
미군은 황해도에서 철수하기로 한뒤에
반동으로 낙인찍혀 학살당하기전 같이 남한으로 가자고하였지만
이들은 끝까지 남아 싸우겠다고한다.
하산하는 북한군에 맞서 습격하고 재령쪽에서 공격해온 북한군으로부터 신천을 몇번이고
재탈환 했지만 피해가 계속 누적되어 피난을 결정한 의거대.
UN군이 철수한 후에도 계속해서 북한군과 맞서 싸우던 그들은
중공군이 도착하여 반격할때 대부분 죽었고
7월27일 장재화등 8명만 귀화하게 된다.
북한측에서는 이들을 곱게 보지않았다.
또 반미를 부추길 좋은 소재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사상검증이니 뭐니하면서 괴롭혀온것은 숨기고
미국에 의해 발생한 신천 재령학살이라 선전하여 반미감정을 유도한다.
반공주의자에게 억울하게 당했던 사람들은 북한을 보다 열렬히 환영했고
주민등록이나 출생지들을 꼼꼼하게 살펴 관련된 가족을 계속해서 색출하는데에 도움을 줬다고한다.
북한측에선 색출된 처단자의 가족들을 죄다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어
강제로 혹사시키거나 집단으로 처형하고 있다.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덕에
북한에서는 92년까지 눈에 띌만한 민중봉기를 보기 어려워졌고
민주화운동이 잘 일어나지않는것이다.
관련영상 링크
나이제한 동영상입니다!
마치고...
북한이 사상검증을 하지 않았다면, 아예 생겨나지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라 생각합니다.
이 생각도 중립적이지 않겠죠 'ㅡ'....
왜 오늘날의 우익중 일부가 기독교색채를 띄는지 궁금해서 조사했습니다.
북한은 기독교탄압을 심하게 했고 이에 45년~46년 여러 사람들이
월남했다고 합니다.
월남한 사람들중 일부는 제주도에가서 서북청년단을 조직한대요.
그리고 제주 4.3...을 일으키죠. 이것도 잘못된겁니다.
만약 제주 4.3을 정당하다고 한다면 우린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과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을 비판할 수 없게 됩니다.
조사하면서 대한민국이 건국되는데엔 정말 여러 사람들이 노력했다는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같이보기?]
피카소는 좌우이념으로 마을사람들끼리 서로 빨갱이다! 반동분자다!
싸우다가 .... 마을사람들이 두패로 나뉘어 싸우는것에 모티브를 얻어
평화를 바라는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데
그게 바로 아래의 그림 두장이다.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작)
후속그림 (평화)
치안대가 조직된 후에도 부역자 숙청과 잔비(殘匪)의 소탕이 주요한 임무였다. 매일과 같이 피의 복수가 계속되었다. 우군이 진격한 후 즉시 대한민국(정부)이 북한을 접수하였더라면 이렇게 처참한 피의 복수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자치적인 치안대에게 방임한 탓으로 무수한 무명의 부역자 가족이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구월산 입산공비와 연락하거나 또는 부역자로 유치된 자를 탈취해 입산할 우려가 있고 처단당한 빨갱이의 자녀를 수용, 보육할 기관이 없음으로서 일단 부역자로 규정되면 전 가족이 처단 당하는 예가 많았다.
치안대원들은 공산당을 잔인할 정도로 처단하는 것은 그들이 배워주고 갔으니 복수할 따름이라고 말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공산당을 죽이는 것은 사탄 (마귀)을 죽이는 것이니 제6계명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석을 내렸다.
이처럼 전율할 피의 보복의 조류가 미친 듯이 전 북한을 휩쓸었으나 그중에서 반공열이 가장 심한 구월산지구가 제일 많았는데 전 인구의 1할 내치 2할이 부역자로 몰리어 처단되었다.[출처] 북한 점령정책을 통렬히 반성하는 국방부의 글|작성자 무수천
북괴자멸추
제1공화국정보추
빨갱이 피카소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