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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홍준표 인터뷰 (2004.2.18 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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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희

홍준표 의원을 만난다는 사실에 총수는 다소 긴장했다, 라기보다는 뭔가 준비를 해야된다는 강박을 갖고 있었다. 약속 2시간 전부터 당 출입기자를 불러다 놓고 이것저것 캐물었다. 정치부 기자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늘어놓았고, 총수는 진지한 척 듣다가 이내 ‘안경을 바꾸라’는 둥 신변잡기 농담따먹기 모드로 전환했다. 어차피 말끔히 정리되지 않을 ‘사전 교양’ 작업의 결론을, 정치부 기자의 감각이 아니라 일반 국민의 눈으로 들여다 보자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큰 원칙에 일단 합의하자, 총수는 퍼졌다.

 

의원회관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총수는 복도 의자에 기대 코를 골며 달디단 낮잠을 즐겼다. 20여분 뒤 깨어난 그는 분명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짐짓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의원회관 707호, 홍 의원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1차 인터뷰>

 

마침 인터뷰를 약속한 오후 2시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안 처리를 위한 국회 본회의가 예정된 시간이었다. “낙선명단에 오르더라도 반드시 투표하겠다”며 기염을 토하던 홍 의원은 본회의 상황을 구내 방송으로 지켜보며 일단 인터뷰에 들어갔다.

 

- 딴지일보 언제부터 봤나.

= 한 3년 됐다. 창간 때부터 줄곧 봤지.

- 요즘은

= 바빠서 일간신문도 볼 시간이 없다

 

- 한화갑 인터뷰 봤나

= 그것도 시간이 없어서… (줄곧 봤다고 했잖아?)

 

- 들어보니까 부인을 만나 결혼하기까지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던데.

= 내가 시골에서 아주 어렵게 살았다. 국민학교 5군데 다녔다. 창령 남지 국민학교, 대구 신천국민학교, 대구 신암국민학교, 창령읍으로 이사와서 창령국민학교, 합천 학남 국민학교. 저의 집이 참으로 어렵게 어린 시절 보냈다. 대구 영남 중고에 진학한 것도 학교에서 돈준다고 해서…

 

- 왜 그렇게 자주 옮겨 다녔나.

= 아버지가 일제 시대 한학자였다. 서당을 했는데 해방 뒤 신식교육 들어오니까 먹고살 게 없어졌다. 아버지가 45살 넘어서 날 낳았는데, 그렇게 살다보니까 삶의 터전 따라서 옮겨다녔다. 신천동 살다가 신암동 옮겼다가 창령읍으로 갔다가 마지막으로 합천 산골까지 갔다. 거기서 국민학교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는 장학금 준다고 해서 대구 영남중고로 갔다, 속칭 따라지 학교였다.

 

- 따라지란?

= 속칭 3류죠. 장학금 준다고 하니까. 어릴 때도 어렵게 살았고 대학 입할 때도 그랬다. 72년, 서울역에 내릴 때 1만4천원 들고 내렸다. 만2천원 하숙비 주고 2천원으로 시작했다. 자취도 하고 아르바이트, 가정교사도 하고. 집사람 만난 것은 대학교 3학년 2학기 때였다. 그때 제적됐다 복학도 하고 …

 

- 왜 제적됐나?

= 등록금이 없어서 제적됐다. 데모하고 유인물 써주면서 그때 법대생들 제적 많이 됐다. 그런거 안하면 바보니까, 나도 학생운동 뛰어들고 하다가…

 

- 단순가담이었나?

= 내가 주로 유인물 써줬다. 유인물 쓰는게 당시에는 제일 중죄다. 글 재주가 있다고 해서 유인물 제작 배포하다가 혼도 났다. 제작해서 배포조한테 넘겨주는 게 우리 임무였다. 여관방에서 가리방으로 밤새 글 쓰고 새벽에 배포조 넘겨주면 일이 끝났다. 유인물 제작하다 경찰서 끌려가 보고, 남산에도 끌려가 보고. 72년 봄에. 그때 (남산) 6국이죠. 8시간만에 풀려났다.

 

- 왜 그렇게 금방 풀려났나

= 잘못 했다고 그래 버렸다. 다시 안하겠다고. 그때는 아버님 돌아가신 직후인데, 아버지가 엉뚱한 짓 하지말라고 유언했었다. 우리가 이념에 투철했던 것 아니다. 현실불만이었다. 그래서 3학년 2학기 때, 고려대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 있었는데, 돈 찾으러 갔다가 집사람 만났다.

 

- 그럴 경우, 보통 말을 못 건네는데

= 말을 못 건넸다. 3학년 2학기 10월말쯤, 법대 동기들이 친구들이 대신 뛰어가서 그 아가씨 데리고 나와서 데이트라고 처음 해봤다.

 

- 사랑의 전령이었네.

= 사랑의 전령까진 아니고.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가서. 그 아가씨 데리고 나왔다. 은행 끝날 무렵에 데리고 나와 나한테 소개시켜준 거다.

 

- 첫 데이트 어디로?

= 그때 마누라가 군산여상 나와서 은행원할 때다. 처음 데이트를 스카라 극장에 간 것으로 기억한다. 차한잔 하고 극장갔다.

 

- 언제 손잡았나.

= 몇달 뒤에.

 

- 그때 속도로도 너무 늦은 거 아닌가

= 그때는 지금하고는 틀리죠. 손잡고 연예를 계속 했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고 집사람은 전북 부안이다. 전라도 여자다. 영호남 감정 극심히 대립할 때 만나서 연예를 4년했다. 그 4년 동안 광주사태 터졌다. 양가 집안 반대 무릅쓰고 사법시험 합격 직전에 둘이 결혼 약속하고, 그 이듬해 사법시험 합격했고. 결혼식 할때도 양가 반대 있었고. 영호남 감정 극심했을 때니까.

 

- 경상도 놈이라고?

= 처음 연예할 때는 극심히 반대했었다. 구름잡는 놈, 현실감없는 놈이라고 장인이 그랬다. 딸주는 장인 입장에서는 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고, 또 고시라는 게 아무나 되는 거냐, 저게 딸 데리고 가면 죽어라고 고생만 시킬 놈, 낭인될 놈 아니냐고 생각했던 거지. 정작 결혼할 때는 사법시험 합격하니까 장인이 머쓱해 졌죠.

 

내가 대학다닐 때 몸무게가 46킬로였다. 몰골도 형편없었죠. 그러니까 사람될 것 같지 않다고 본거다. 그래서 반대했는데 시험 합격하고 사람 되가니가, 정작 장인이 결혼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 부인은?

= 집사람은 저에 대해 종교적 신앙을 갖고 있다.

 

- 비법이 뭔가?

= 결혼할 때, 가장 중요한 약속 해줬다. 당신과 사는 동안은 절대 딴 여자 넘보지 않는다는 것.

 

- 왜 부인이 믿었을까

= 집사람은 나를 아주 진솔한 사람으로 본다.

 

- 거짓말 안하기 때문인가?.

= 네. 그거 하나로 나한테 대해서는 집사람이 종교적 신앙으로 좋아한다

 

- 최근에도 확인했나.

= 24년간 살아도 그렇다. 집사람이 나 이외 남자 좋아한다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 결혼하고 나서도 왜 안 흔들렸을까

= 내가 거짓말 안하고 살려고 한다.

 

- 부인한테 거짓말 한번도 안했다고 생각하나

=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선의의 거짓말도 있다. 어쩔수 없이 선의로 집사람 속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외에는 악의로 거짓말 한 적 없다.

 

- 그럼 ‘선수’들은 제외하고 말하는 거냐

= 나는 그런 관계 가진 적 없다. 룸살롱 안가기 시작한 것이 당시 조직폭력 수사하면서부터다. 공직생활 하면서 가장 약점이 돈과 여자다. 돈과 여자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한 게 91년부터다.

 

- 왜 하필 그때였나

= 조폭 수사하면서 검사들에 대한 음해가 굉징히 심했다. 음해 입지 않고 수사하려면 돈과 여자로부터 자유로와야겠다고 생각했다.

 

- 무슨 음해?

= 조폭들로부터 음해 있다. 무기명 투서를 검찰 고위간부한테 낸다. 91년 광주지검 가면서부터 여자 있는 술집에 가능하면 참석하지 않았다. 사적 모임도 룸살롱에서 하면 안가려고 했고, 들어가더라도 30분 이내 나왔다. 91년 3월부터 출입 거의 안한 것으로 기억한다. 부득이하게 갔더라도 30분 이내. 구설수에 오르니까. 공직생활 하면서 돈과 여자로부터 자유로와야 큰소리 칠수 있다는 생각이 91년 3월 광주에서 조폭 수사하면서부터 들어서 13년째 지금까지 지키고 살고 있다.

 

- 조폭 음해는 어떤 식으로

= 검사들이 스트레스 쌓이다 보면 술먹고 오입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조폭 수사위해 일부 조폭과 어울리기도 하고 그런게 청와대나 검찰 감찰에 진정이 됐기 때문에, 91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그런 생각했다. 그래서 내 생활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 그 시절 활약으로 모래시계 모델도 된 거죠.

= 검찰에서 잘 나갔다기 보다도 만 11년 동안 밑바닥 생활만 했다. 귀족검사 대접 받은 적 없고, 요직에 가보지 못했고. 대검이나 법무부 근무한 적 없고. 밑바닥에서 오직 수사만 11년 했다.

 

 

- 왜 그랬나. 줄이 없어서?

= 줄이 없다기 보다도 고집이 좀 있다. 검찰로 수사 하다가 고집스럽게 상관과 충돌하고 또 내 나름대로 원칙 내세우고 하다 보니까. 그래서 밑바닥 평검사로 11년.

 

수사 관련해서 권력비리 수사나, 조직폭력배 수사일 때는 상관의 명을 많이 거슬렀다. 예를 들면 88년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 수사하면서, 당시 전두환 형 구속했고, 그 다음 권력최정상 있던 사람 수사하고자 할때, 검찰 수뇌부, 청와대에서 수사 못하게 햇다. 그 수사를 여론동원해서 강행하다가 수사 마지막 결정단계에서 진실을 밝혀놓고, 수사기록을 빼앗겼다. 나는 특수부에서 형사부로 쫓겨갔다. 형사부에서 2년 이상 썩고 있다가 광주로 다시 쫓겨갔다. 거기서 조폭 1년반 수사했다. 깡패와 대결을 1년 3개월동안 하다가, 깡패들의 로비로 서울지검으로 오게 된다.

 

- 깡패들의 로비?

= 내가 광주에 있으면 (조폭들이) 못견디니까, 서울지검에서 슬롯머신 수사할 때도 당시 검찰 수뇌부, 청와대에서 반대했다. 그것을 여론을 통해서 반대 무마하고 수사하면서 검찰 내부 수사했다.

 

- 여론 통한다는 건?

= 언론을 통해 흘리고 수사했다. 수사는 결국 성공했지만 검찰 내부를 너무 뒤흔들었다, 검찰 고위간부 여섯사람 구속하고 한사람 사표받았다. 너무 흔들었다 해서 결국 2년 뒤에 제가 사표내고 나온다.

 

- 그 2년 동안 눈치 많이 봤겠네?

= 눈치 많이 줬다. 나하고 밥먹으로 가자는 검사 없었다.

 

- 배신자라는 거냐

= 그렇죠. 조직을 뒤흔든 배신자라는 거죠. 그 사건으로 저는 개인적으로는 각광 받았지만 검찰조직으로부터는 조직의 배신자라는 누명을 썼다.

 

- 그래서 이후 2년만에 스스로 관둔 건가?

= (계속) 해볼려 했는데 분위기 자체가 하도 사람을 경원하고 배척하는 분위기여서. 그때 사표쓰고 나왔다.

 

- 모래시계 김종학 피디는 어떻게 만났나.

= 김피디가 94년 8월, 송진아 작가와 함께 찾아왔다. 그때 처음에 두어번 거절했다. 검사를 소재로 드라마 만드는 건 넌센스다. 검사는 드라마 소재가 되서는 안된다. 신비스런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 좋다, 고 했다. 그런데 고위간부가 당시 검찰이 너무 망가졌는데, 정의로운 검사로 묘사한다고 하니, 스토리텔링 해주고 드라마 협력해주라고 해서, 했다. 관두기 1년전에 했다.

 

- 관두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 내 팔자에 검사가 됐다면 더이상 부러울 게 없다는 생각으로…

 

- 목표가 검사였나.

= 그렇진 않았지만 내 팔자에 검사했다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직업 가졌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이게 내 평생 직업이고 평생을 이 일을 위해 살다가 가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슬롯 머신 이후에 조직으로부터 철저히 경원, 배척당하니까 그 조직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만두게 됐다.

 

- 조직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텐데..

= 검찰은 협조체제 강구해야 되는데, 조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손가락질 당하니까 남아있으니까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 내부고발자는 항상 갈등 많이 겪는데

= 해방 이후 부패로 구속된 검사는 그 당시 사건으로 처음일 거다. 평검사가 고등검사장 수사해서 처단한 것은 일본검찰 100년사에도 없는 일이다. 검찰고위간부 보낸다는 생각으로 수사했지만, 마지막 순간 이 수사 끝나면 조직 떠나야 된다는 생각했다.

 

- 왜 끝까지 가겠다는 생각했나.

= 왜 못 멈추었느냐 하면 박철언 때문이다. 박철언 구속한 뒤 엄삼탁 안기부 기조실장도 구속되고 초대 경찰청장도 구속됐다. 여기서 그치면, 어느 정도 타협보면 내부로부터는 소외 안당한다는 생각했는데, 내부 수사 안하면 와이에스 용병 수사, 청부 수사했다는 오명 남길 수 있다는 생각했다. 와이에스와 대립하는 박철언 수사했다는 오명말이다. 공평한 평가 받기 위해 내부 수사 불가피하게 했다.

 

 

- 결국 검찰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수사였네?

= 개인적 차원이다. 검사로서 정의로운 검사로서 수사 해보고 싶었는데, 박철언에서 끝나면 용병수사가 된다. 마지막까지 갈 수박에 없었던 것은 용병수사 오해 피하기 위해. 검찰 내부 수사 안할 수 없었다. 93년 5월에 내부 수사 안된다는 검찰 수뇌부의 공식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틀동안 사표내겠다면서 내부 수사 강행했다. 사표내겠다고 언론에 공언하고, 그래서 여론 등에 업고 내부수사 강행했다.

 

수사결정하고 대검수뇌부와 저 혼자 이틀에 걸쳐 힘겨루기 했다. 힘겨루기 해서 여론통해 내가 이겼다. 이젠 검사 더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면서 수사했다. 그 수사 끝나고 난 뒤에 공소유지가지만 해보자. 공소유지까지만 하고 진퇴여부 결정하고…. 그랬는데 1년 뒤에 공소유지했다. 94년6월27일 박철언 상고기각 되고 모든 사건이 종결됐을 때도, 내가 검사에 미련이 있었다. 그래서 안나가고 1년 더 버티었다. 그해 10월쯤 되서 안기부 파견제의가 들어왔다. 당시에 분위기가 검찰에 놔두면 무슨 짓 할지 모르니 안기부 데려가자는 거였는데, 파견나갈 때도 1년만 피해있다가 오면 검찰조직이 홍준표 거부하는 분위기 완화되지 않겠나 싶었다. 안기부 파견나가서 러시아 마피아 대책반장했다. 그 당시 내가 한러 정보기관 주재하면서 러시아 마피아 대책을 당시에 세운 것이 지금도 그 프로그램 그대로 가동되고 있다.

 

1년 뒤에 돌아와 보니 여전히 안티 세력들이 너무 강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더이상 검찰 내에서 도망할 데도 없어서 불가피하게 그만두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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