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CIA) 분석관 출신의 영향력 있는 북한 전문가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대리한 혐의로 16일(현지시각) 미국 연방법원 재판에 넘겨졌다.
미국 뉴욕 남부지검은 이날 공개한 공소장에서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 혐의로 수미 테리 연구원을 기소했다고 밝혔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수미 테리는 고급 저녁식사와 명품 핸드백, 연구활동비 등을 받은 대가로 한국 정부를 위해 활동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한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활동해오면서 미국 법무부에 관련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외국대리인등록법을 위반한 혐의도 적용됐다.
서울 출생으로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해 미국 국적을 취득한 수미 테리는 뉴욕대에서 정치학으로 학사 학위를, 보스턴 터프츠대에서 국제관계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부터 CIA에서 동아시아 분석가로 근무했고, 2008~2009년에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한국·일본 및 오세아니아 과장을 지냈으며 동아시아 국가정보 담당 부차관보까지 역임했다.
이후에는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 윌슨센터 아시아프로그램국장 등 다양한 싱크탱크에서 일하며 대북전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미국 검찰은 수미 테리가 CIA에서 퇴직한 지 5년 뒤인 2013년부터 최근까지 외교관으로 신분을 등록한 국정원 요원과 접촉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이 기간 수미 테리는 국정원 간부의 요청으로 전·현직 미국 정부 관리와의 만남을 주선하거나 한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한국 정부의 대리인으로서 역할을 했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특히 국정원 관계자가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수미 테리에게 미국 주요 매체에 한미 핵 협의그룹(NCG) 구축 필요성을 강조하고, 한일관계 개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고문을 투고하도록 했다는 내용도 공소장에 담겼다.
◇명품 코트, 명품 가방, 고급식당 식사 등 정황 증거사진 공개검찰은 그 대가로 수미 테리가 2019년 11월 국정원에서 파견된 워싱턴DC 한국대사관의 공사참사관으로부터 2845달러(392만원) 상당의 돌체앤가바나 명품 코트와 2950달러 상당의(407만원) 보테가베네타 명품 핸드백을 선물 받은 것에 주목했다.
또한 2021년 4월 역시 국정원 파견 간부인 주미대사관의 후임 공사참사관으로부터 3450달러(476만원) 상당의 루이뷔통 핸드백을 선물 받은 사실도 수미 테리가 외국인등록법을 위반해 한국 정부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는 증거로 제시됐다.
미국 검찰은 이 같은 명품 구매 관련 사실을 해당 국정원 간부의 신용카드 결제내역과 매장 CCTV 화면을 통해 파악했다. 또 추후 이뤄진 수미 테리의 주거지 압수수색을 통해 해당 코트와 명품 가방을 증거로 확보했다.
검찰은 범죄 사실에 수미 테리가 국정원 간부와의 만남 과정에 미슐랭 스타 인증 레스토랑을 비롯한 고급식당과 바에서 여러 차례 식사를 한 사실도 포함했다.
미국 검찰은 특히 2020년 8월 국정원 파견 공사참사관 전·후임 2명이 인수인계 차원에서 수미 테리와 함께 뉴욕 맨해튼의 한 그리스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사진을 수미 테리가 국정원 간부와 밀착해 한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일했다는 정황의 증거사진으로 첨부하기도 했다.
2022년 수미 테리가 몸담은 싱크탱크 기관의 프로그램에 수미 테리가 자유롭게 연구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금 3만7000달러(5100만원) 이상을 국정원이 전달한 것도 그가 한국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한 대가로 판단했다.
무엇보다 미국 검찰이 엄중하게 본 부분은 수미 테리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이 참석한 대북전문가 초청 비공개 간담회 내용을 회의가 끝나자마자 국정원 간부에게 흘렸다는 의혹 부분이다.
2022년 6월 워싱턴DC 미국 국무부 건물에서 1시간가량 열린 이 회의는 블링컨 장관을 비롯한 국무부 고위 간부들 외 5명의 한반도 전문가만 참석한 비공개회의였다.
간담회 논의 내용은 외부 유출이 금지됐지만 수미 테리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외교관 번호판이 붙은 국정원 파견 공사참사관의 차량에 탑승했고, 공사참사관은 수미 테리가 적은 2페이지 분량의 회의메모를 사진으로 촬영한 것으로 검찰은 판단했다.
검찰은 수미 테리가 조사과정에서 메모를 건넨 사실을 시인했다고 밝히면서 해당 메모 사진을 확보해 공소장에 증거자료로 첨부했다.
◇美 공직자, 외국 정부 위한 일에 엄격…다른 전문가들의 대외 정보활동 위축 우려수미 테리는 또한 세 차례에 걸쳐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했다. 청문회 출석에 앞서 본인이 등록된 외국 정부의 대리인이 아니라고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수미 테리가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가능성을 인지하고서 위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라고 검찰은 판단했다.
미국의 외국대리인등록법은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이 외국 정부나 외국 기관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경우 스스로 그 사실을 당국에 신고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직자는 외국을 위해 일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지만, 일반시민은 직업의 자유 차원에서 외국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데 제한이 없다. 다만 해당 사실을 미리 신고해야 한다.
지난해 중국 정부가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에 설치한 '비밀경찰서'와 관련해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2명이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가 인정된 바 있다.
뇌물수수 등 혐의로 기소돼 이날 유죄 평결을 받은 미국 민주당 밥 메넨데스 상원의원(뉴저지)도 이집트 정부의 대리인으로 활동해 외국대리인등록법을 위반한 혐의를 함께 받았다.
수미 테리 측은 관련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수미 테리의 변호인인 리 월러스키 변호사는 "이들 의혹은 근거가 없고, 독립성을 갖고 수년간 미국에 봉사해온 것으로 알려진 학자이자 뉴스 분석가의 업적을 왜곡하는 것"이라며 "한국 정부를 대변해 활동했다는 의혹을 사는 기간 수미 테리는 한국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다"라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한편 과거 FBI는 2007년 재미교포 사업가 박모씨를 국정원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대북 첩보활동을 벌인 혐의로 기소한 바 있지만, 미국 싱크탱크에서 활동하는 전직 관료 출신 전문가를 기소한 것은 처음이다.
업계 안팎에서는 윤석열 정부와 조 바이든 행정부가 한미동맹 강화는 물론, 한-미-일 3각 협력 강화 등으로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현 상황을 고려하면 예상외라는 반응이 적지 않다.
한미 정부가 한반도 전문가들과의 광범위한 의견수렴을 통해 한반도 정세 분석 및 향후 정책구상을 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른 전문가들의 대외 정보활동도 위축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4/07/17/2024071700305.html